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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채진석의 '컴 ON'

기술 혁명과 애플의 위기

미국의 과학사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토머스 쿤(Thomas Kuhn)이 쓴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이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과학의 발전이라는 것은 지식이 차곡차곡 누적되어 이루어지는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이상 현상이 발생하면서 위기가 생기고 이러한 위기가 혁명을 통해 패러다임이 바뀌는 불연속적인 것이라는 점을 여러 사례를 통해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플로지스톤에서 산소로, 창조론에서 진화론으로, 뉴턴 역학에서 상대성이론으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과정은 지식이 점진적으로 축적되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위대한 천재에 의해 혁명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과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 산소를 발견한 라부아지에, 진화론을 주장한 다윈, 상대성이론을 주장한 아인슈타인과 같은 천재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필자는 대학원 시절 이 책을 읽으면서 과학사를 이렇게 독창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구나 하고 놀라워했던 기억이 있다.


 이 책에서는 과학자 사회가 동일한 패러다임을 가지고 연구하는 상황을 ‘정상과학’이라고 부른다. 이 상태에서 연구가 활성화되고 많은 연구자가 논문을 발표하다 보면 정상과학에서는 답할 수 없는 ‘이상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쿤은 이것을 ‘위기’라고 부른다. 과학계에 위기가 닥치면 과학자들은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노력하게 되는데, 이러던 중 천재 과학자의 번뜩이는 영감에 의해 기존의 이론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이론이 제시된다. 이것은 처음에는 기존 과학자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지만 다양한 실험에 의해 증명되면서 서서히 기존 과학자들의 생각을 바꾸게 되고, 어느 시점이 되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세상과 과학을 바라보게 되는 새로운 ‘정상과학’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대학원 시절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컴퓨터과학의 데이터베이스 분야에서도 과학혁명의 구조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다. 데이터베이스 초창기에는 계층형 데이터베이스, 네트워크 데이터베이스 등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데이터베이스로는 효율적으로 처리하지 못하는 여러 이상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1970년 IBM 산호세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에드거 코드(Edgar Codd)라는 천재가 관계 모델에 기반한 관계 데이터베이스를 제안했고, 1980년대에 관계 데이터베이스가 대유행을 하게 되면서 관계 데이터베이스는 정상과학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팀 쿡 애플 CEO가 샌프란시스코 예바 부예나센터에서 아이폰5를 소개하고 있다. (출처: 경향DB)


필자는 기술혁명의 경우도 과학혁명과 마찬가지로 불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피처폰이 정상과학을 형성하고 있던 시기에 스티브 잡스라는 천재는 피처폰의 이상 현상들을 단번에 해결한 아이폰을 출시해 휴대폰의 기술혁명을 이루게 된다. 아이폰이 처음 나왔을 때 휴대폰에서 손가락만을 움직여 사진을 앞뒤로 이동시키고, 엄지와 검지를 사용해 화면을 확대·축소하는 기능을 얼마나 신기하게 여겼는지 생각해 보자. 사실 아이폰이 국내 스마트폰의 발전에 끼친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다. 국내 통신사들이 수익성 감소를 우려해 휴대폰에서 무선랜(Wi-Fi)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에서 아이폰이 출시되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처럼 우리나라의 스마트폰 기술이 발전할 수 있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아이폰 출시에 자극받은 삼성을 비롯한 후발 업체들은 베끼기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아이폰을 따라하게 되는데, 후발 업체들이 아이폰의 기능을 어느 정도 따라잡게 되자 아이폰에서 새롭게 소개된 기술들이 이제는 정상과학의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스마트폰 제조사들 간의 기술력 차이가 줄어들게 되어, 기능의 차이보다는 누가 더 사용자 친화적으로 사용하기 편리한 휴대폰을 만드느냐가 중요하게 된다. 


이러한 정상과학 시대에는 혁명이 필요할 정도로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한, 현 상태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되는데, 앞으로 스마트폰 시장에서 이상 현상들이 축적되어 위기가 심화되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 10대 시절부터 13년 동안이나 애플의 제품만을 사용해 왔다는 영국의 한 언론인이 현재 애플의 최고경영자인 팀 쿡 앞으로 “DEAR APPLE: I’m Leaving You(친애하는 애플, 이제 당신을 떠납니다)”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삼성 제품을 사용하기로 했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는데, 최근 들어 필자의 주위에도 아이폰을 쓰던 사람들이 속속 삼성폰으로 휴대폰을 바꾸는 것을 보면 애플이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제 스티브 잡스도 없는 상태여서 애플이 스마트폰에서 더 이상의 기술혁명을 이루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애플의 위기가 삼성전자나 LG전자와 같은 우리나라 스마트폰 제조사들에 약이 될 것인지 독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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