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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채진석의 '컴 ON'

뿌리 깊은 나무

채진석|인천대 교수·컴퓨터공학

요즘 <뿌리 깊은 나무>라는 드라마에 푹 빠져 있다. 여기에서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고 해서 보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목요일에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다음주 수요일까지 기다리기가 힘들 정도로 재미있게 보고 있다. 이 드라마에서는 세종대왕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조명하고 있다.
 

경향신문DB

정치가로서 세종대왕은 백성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려는 시도를 하는 권력자로 나온다. 일반적으로 권력자는 백성들이 똑똑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정치 외에 다른 곳에 관심을 쏟기를 원하기 마련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5공화국 시절의 3S로 대표되는 우민화 정책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세종대왕은 어리석은 백성을 위해 쉬운 문자를 만들어 자신과 사대부에게 집중되어 있는 권력을 나누어 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과학자로서 세종대왕은 인류 역사상 가장 무모한 연구목표를 세운 연구책임자로 보인다. 세종대왕의 연구목표는 드라마에서 세종대왕을 항상 옆에서 보필하는 대제학 정인지가 쓴 ‘정인지서(鄭麟趾序)’의 첫 문장에서 유추할 수 있는데, 그것은 有天地自然之聲 必有天地自然之文(유천지자연지성 필유천지자연지문)이다. 이 문장을 해석하면 천지자연에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그것을 받아 적는 문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세종대왕은 천지자연의 모든 소리를 받아 적는 문자를 창제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만일 아직도 우리나라에 한글이 없는 상태에서 누군가 이러한 연구목표를 세워 연구비 신청을 한다면 십중팔구는 과제 선정에서 탈락할 것이 분명하다. “목표는 훌륭하지만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사료됨”이라는 심사평과 함께.

그런데 세종대왕은 제안서가 선정되어야 연구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일반적인 연구책임자가 아니라 원하는 기간만큼 얼마든지 연구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당대의 임금이었다. 따라서 훈민정음 프로젝트는 제안서 심사도 받지 않고 예산의 제약도 없었으며, 감사도 받지 않고 연구 목표를 이룰 때까지 계속해서 수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단계별 평가나 중간 연구 결과 발표회 같은 것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 지식경제부에서 토종 모바일 운영체제를 개발하겠다고 했다가 중단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제대로 된 운영체제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훈민정음 프로젝트와 같이 10년이든 20년이든 지속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권이 바뀌거나 부처가 없어진다고 해서 중단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면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다. 운영체제는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도 몇 년 만에 뚝딱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세종대왕은 연구목표를 달성했는가?

필자는 세종대왕이 연구목표를 100% 달성했다고 굳게 믿고 있다. 필자가 대학원에서 한글 코드를 공부하던 시절 인상 깊게 읽었던 글 중의 하나는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를 설명한 동국대학교 변정용 교수의 논문이었다. 이 논문에서 변 교수는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에 따르면 약 400억개의 문자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계산하고 있는데, 세종대왕은 문자가 400억개 정도는 되어야 천지자연의 모든 소리를 받아 적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드라마에 보면 세종대왕이 옥동자 정종철을 불러서 악기 소리, 개 짖는 소리, 돼지 우는 소리 등을 내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결국 천지자연의 모든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문자를 창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훈민정음의 보급과 관련해서는 김다은 교수의 <훈민정음의 비밀>이라는 소설을 읽어볼 만하다. 이 소설에서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보급하는 방안을 고심하다가 과거시험에 ‘백성들이 주야로 훈민정음을 깨치게 할 방안을 찾아내라’는 문제를 낸다. 이 문제에 대해 중인 출신의 이개는 임금이 훈민정음으로 된 훈민복음을 내려서 모든 사람들이 베껴 쓰게 하면 자연히 훈민정음이 널리 퍼질 것이라고 답해 장원을 차지하게 된다.

이에 세종대왕은 이개에게 훈민복음을 내리게 되는데, 훈민복음에는 훈민정음의 28자를 자음과 모음으로 나누어 나열하고 나서 이 글을 필사하여 전하는 자마다 복을 받고, 그 복음을 받는 자도 복을 받을 것이며, 사람들에게 많이 보낼수록 더 많은 복을 받게 되지만, 혹시 잘못 필사하여 자모의 순서가 바뀌면 복을 잘못 전할 수 있으니 신중을 기하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물론 소설 속의 일이라 실제로 훈민복음이라는 것이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훈민정음의 보급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세종대왕을 상상해 본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이제 곧 드라마는 끝나고, 필자가 좋아하는 한석규와 신세경을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갈 것이지만, 백성들을 위해 무모하게만 보이는 연구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평생을 헌신한 세종대왕의 이야기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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