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중엽 유럽에서는 ‘공감하는 바늘’이 대유행이었다. 두 바늘을 같은 자철광으로 동시에 자석으로 만들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도 서로 다른 바늘에 ‘공감해서’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는 주장이 그 배경에 있었다. 똑똑한 사람들은 한 바늘 주위에 알파벳으로 원을 만들고 각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메시지를 만들어 보내면 다른 바늘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이 메시지를 그대로 복제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그야말로 환상적인 정보전달 장치의 가능성이 열리는 셈이었다. 당시 시대조류에 밝았던 영국의 문필가 토머스 브라운은 이 바늘 이야기가 사기임에는 분명해 보이지만 평소에는 잘 속지 않는 학자조차 이런 멋진 가능성을 쉽게 부정하지는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이런 주장을 왜 당시 자연철학자들은 섣불리 부인하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당시까지 자기의 속성에 대해 알려진 바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 금속을 끌어당긴다는 사실 자체는 고대부터 알려져 있었고, 그 힘을 이용해 가벼운 소년을 공중에 띄우는 구경거리는 당시 유럽 궁정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자기가 정확히 어떤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지금은 허무맹랑하게 들리는 자기에 대한 주장조차 원리적으로 간단하게 배제하기는 어려웠다.
근대 천문학과 역학의 기초를 놓은 위대한 자연철학자 갈릴레오는 자신의 책 <대화>에서 이 ‘공감하는 바늘’에 대해 철저한 실험적 검증을 요구했다. <대화>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인 사그레도는 다른 두 친구에게 한 사기꾼이 자신에게 ‘공감하는 바늘’이 먼 거리에 있는 사람과 은밀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하며 군사적으로 매우 유용한 물건이라 선전했다고 이야기한다. 갈릴레오는 당시 후원을 바라는 자연철학자 대부분이 그러했듯 자신이 직접 제작한 군용 캠퍼스로 상당한 돈을 벌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사그레도는 이 신기한 바늘에 흥미를 보이며 구매 전에 간단한 실험적 증명을 요구한다.
자신이 방에서 바늘을 조작하면 다른 방에 있는 사람이 그 메시지를 정말 받을 수 있는지 확인해 보자는 것이었는데 사기꾼은 당연하게도 이 실험을 거절했다. 그 이유가 재미있다. ‘공감하는 바늘’은 특성상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억지스러운 설명에 사그레도는 자신은 이 바늘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카이로나 모스크바로 여행 갈 생각은 없으니, 자신에게 바늘을 팔고 싶다면 사기꾼더러 직접 그곳으로 가서 메시지를 보내면 확인해 보겠다고 대응한다.
‘공감하는 바늘’에 대한 사그레도의 대응은 과학적으로 적절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잘못된 것이었다. 이런 바늘에 해당하는 인과작용이 현대 양자정보 전송에서 실제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쌍의 ‘공감하는 바늘’처럼 같은 양자상태로 준비된 두 입자를 서로 멀리 떨어뜨려 놓으면, 한 입자의 상태 변화가 다른 입자의 상태 변화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를 활용해서 통계적 방식으로 정보 전송도 가능하다. 물론 그 방식은 알파벳을 가리키는 바늘의 움직임을 읽는 것보다는 훨씬 복잡하지만 분명 이런 현상은 존재한다. 그런데 왜 이런 현상이 20세기 후반이 되기까지 관찰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처음 한 상태로 묶인 두 입자의 연결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갈릴레오 시대에 누군가가 이런 신비로운 ‘양자 연결’이 존재하지만 실제로 이를 활용하는 장치를 만드는 일은 매우 어렵다고 주장했다고 상상해보자. 확실한 경험적 증거만을 고집하는 자연철학자라면 이 ‘양자 연결’을 ‘공감하는 바늘’과 마찬가지로 즉각 무시했을 것이다.
이렇듯 과학연구 과정에서 경험적 증거가 불확실할 때는 올바른 이론도 거부될 수 있는 위험성이 항상 있다. 이런 위험성을 고려할 때 좀 더 과학적인 대응은 익숙한 직관에 입각하여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보다 광범위하게 증거를 수집하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일본 교토부 교탄고시 교가미사키 인근에 있는 미군 사드 레이더 기지. 왼쪽 위 초록색 건물의 바닷쪽 앞에 사드 레이더가 설치돼 있다. 레이더는 뒤로 보이는 동해 바다를 향하고 있다. (교토/윤희일 특파원)
최근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의 장기적 효과에 대한 여러 우려를 ‘괴담’으로 간단히 무시하려는 사람들은 이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사드에서 발생하는 전자기파가 장기적으로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경험적 자료 자체가 매우 부족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과학지식의 빈자리를 지속적으로 메우면서 동시에 사전주의(precautionary) 원칙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취해 나가는 것이다.
이상욱 | 한양대 철학과 교수·과학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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