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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

이백예순 날 살기 위하여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인간은 바다를 버리고 좁고 건조한 육상에 정착한 성급하고 무모한 조상의 자손이다. 2004년 시카고대학 해부학자 닐 슈빈은 북극 엘스미어 섬에서 발이 있는 물고기 화석을 찾아내 바다와 뭍을 잇는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를 연결했다. 뼈와 근육으로 구성된 물고기 지느러미는 닭의 날개, 인간의 팔과 그 기원이 같은 상동 기관이다. 재담을 즐기는 사람들은 엄마의 말을 거꾸로 듣는 자식 물고기가 뭍에 오르는 그림을 그리고 씩 웃었지만 사실 그들에게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바다전갈과 같은 맹폭한 포식자를 피해 또는 지각 변동으로 바다가 높이 솟아서 어쩔 수 없이 우리 물고기 조상들은 육상으로 도망쳤을지도 모르겠다. 사나운 소를 길들여 인간 집단으로 끌어들이는 데 2000년 넘게 걸렸다는 연구 결과에서 짐작하듯 동물이 육상에 정착하는 데는 분명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물 밖에서는 몸 안의 물을 지키는 일이 우선이다. 특히 수정란을 마르지 않게 지켜 유전적 대를 잇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조류나 파충류의 알, 딱딱한 외피를 두른 은행나무의 열매가 등장한 까닭이 그것이다. 공기 중 산소를 추출할 허파를 갖춘 생명체들은 뭍에서 사부작사부작 자신의 영토를 넓혀 나갔다. 인간을 포함한 태반 포유동물은 알 껍데기 대신 태반을, 노른자 대신 탯줄을 발명해 자신의 유전자를 전달하는 새로운 방식을 진화시켰다. 임신부와 태아가 만나는 경계에서 태반은 생명체가 탄생하는 데 필요한 물과 산소 및 영양소를 오롯이 공급한다. 그렇게 인간 태아는 최초의 생명이 비롯된 바다와 흡사한 환경에서 꼬박 260일 동안 쉼 없이 자란다.

 

적은 수의 자손을 안전하게 키우는 장소이자 설비로서 태반은 가장 진보한 유전자 배양기이자 포유동물 고유의 자랑거리라고 뻐기지만 사실 우렁이나 일부 도마뱀에게도 태반이 있고 거기서 새끼를 낳아 키운다. 이들과 인간의 태반이 다른 점은 태반이 임신부의 자궁벽에 얼마만큼 잠겨 있느냐 하는 것이다. 깊이 잠겨 있으면 혈액으로부터 더 많은 양의 산소와 영양소를 얻을 수 있지만 그만큼 임신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침습(侵襲)’ 태반이 불가피하게 어미의 조직과 혈관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침습 정도가 낮으면 태아가 성장에 필요한 영양소를 충분히 얻지 못한다. 이렇듯 산소와 영양소를 두고 태아와 임신부 사이에 적절한 타협이 이루어진 결과 태반의 위상이 결정되었다.

 

약 아홉 달 터울을 두고 태반은 자궁벽에 붙었다 떨어진다. 태아가 자라면 태반도 함께 자란다. 따라서 착상할 때보다 신생아를 출산하고 600g이 넘는 태반이 제거될 때 출혈이 훨씬 심하다. 태반을 위시한 인간의 생식체계는 이런 출혈을 완벽히 제어하게 된 후에야 비로소 작동할 수 있었다. 바로 혈소판 덕이다.

 

생물학자들은 인간이 약 200종류의 세포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그중에서 가장 흔한 세포는 단연 적혈구이다. 산소를 운반하는 적혈구 수는 전체 세포의 약 70%인 약 26조개다. 약 2조개에 이르는 혈소판이 두 번째로 많다. 크기가 가장 작은 땜장이 세포인 혈소판은 골수에서 생성되지만 의외의 장소인 허파에서도 상당량 만들어진다. 허파꽈리를 둘러싼 실핏줄이 터지면 산소를 공급하고 이산화탄소를 내뱉는 일에 차질을 빚기 때문이다. 허파 혈관이 터지면 작디작은 혈소판 떼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순식간에 상처를 봉합한다. 닭이나 도마뱀 혈액 안에도 땜장이 역할을 하는 세포가 없진 않지만 결코 인간 혈소판의 기예를 따르지 못한다. 평소에도 혈소판은 다양한 성장 인자를 분비하여 혈관 벽을 견고하게 유지한다. 그렇기에 혈소판이 부족하면 혈관이 터지고 가벼운 상처에도 멍이 들곤 한다.

 

태반이 엄마 순환계에 접근하려면 혈관 손상은 불가피하다. 다급한 태아는 신호 물질을 만들어 임신부의 혈소판을 애타게 부른다. 이에 응하여 혈소판은 태반 주위로 몰려들고 혈관을 온전히 보전하여 태아가 잠길 작고 따스운 바다에 흠 없는 운하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렇듯 260일 남짓 모든 적혈구와 혈소판이 돌보아야 비로소 하나의 생명체가 완성된다. 인간 형상을 갖추었다곤 해도 아직 무력한 아기가 홀로 서기까지 길은 멀다. 온 세상이 근사를 모을 일이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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