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과학오디세이

후성유전학의 메시지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과학이론은 평생 머릿속에 각인돼 있기 쉽다. 한때 거짓이라고 판명된 과학자의 주장이 어쩌면 옳았을지 모른다고 의문을 품는 사람은 일부 관련 연구자에 한정된다. 하지만 그 내용이 사람의 건강과 밀접히 연관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일반인의 상식으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는 방사선 노출 같은 특별한 상황에 처하지 않는 한 평생 변하지 않는다. 교과서에도 다윈과 동시대에 활동한 라마르크가 설파한 ‘획득형질의 유전’ 현상은 없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최근 생물학계에서 색다른 해석이 나오고 있다. 유전자변형생물체(GMO)나 유전자 검사 등 일반인의 일상을 파고드는 생명공학의 산물에 대해서도 새롭게 의미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최근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과학사학자 로렌 그래암 명예교수가 <리센코의 유령>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리센코는 20세기 중반까지 옛 소련에서 강력한 위세를 떨친 식물학자였다. 가을에 뿌리던 작물 종자를 저온에서 보관해 봄에 심는 춘화처리에 대해 연구한 그는 환경에 따라 변화된 유전자가 후대까지 전달된다고 주장했다. 획득형질은 절대 유전될 수 없다고 보는 주류 생물학계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였다. 그런데 리센코의 주장이 ‘유령’처럼 다시 떠돌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 계기는 책의 부제 ‘후성유전학과 러시아’에 나타나 있다. 21세기 생물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고 있는 후성유전학(epigenetics)은 다윈이 반드시 맞지 않을 수 있고, 라마르크는 우리 생각보다 좀 더 맞을 수 있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현재 러시아 일부 학자에게서 ‘리센코가 옳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이유이다.

 

19세기 유럽에서는 진화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다. 지구의 생명체들이 환경에 적응하며 조금씩 변해가고, 마침내 새로운 종이 탄생하는 듯한 현상이 관찰됐다. 문제는 진화의 메커니즘이었다. 라마르크는 ‘용불용설’을 내세웠다. 예를 들어 기린의 목이 길어진 것은 높은 가지에 달린 잎사귀를 먹으려 애를 쓴 결과이고, 이 형질이 후손에게 전달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다윈의 ‘자연선택설’에 따르면 원래 기린 집단 내에 목이 긴 개체와 짧은 개체가 섞여 있었고, 낮은 가지에 달린 잎사귀가 없어져 목이 긴 개체만 살아남는다. 오랫동안 교과서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진 내용이다. 물론 후성유전학은 기린의 목이 길어진 이유를 라마르크처럼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에 의해 평생 형질이 결정되지 않으며, 태어난 후의 다양한 행동에 의해 유전자의 ‘작동 양상’이 변해 후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다양한 행동에는 음식 섭취와 운동 등의 생활습관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여성의 브라카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발생하면 80세에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87%에 달한다. 2013년 5월 여배우 앤젤리나 졸리는 자신의 브라카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예방 차원에서 유방절제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브라카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유방암 발생의 절대조건이 아니다. 돌연변이 유전자를 보유했다고 해서 모든 여성이 유방암에 걸리지는 않는다. 바로 이 차이, 즉 동일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지만 그 작동 양상이 달라지는 이유를 연구하는 학문이 후성유전학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유전자에 메틸기와 아세틸기가 달라붙으면 그 유전자의 작동이 허용되거나 차단된다. 그리고 그 양상은 사람의 생활습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후성유전학의 내용이 발표되면서 서구 사회에서는 이를 인간이 먹고 있는 GMO와 연관시켜 논의하는 일이 활발하다. 가령 GMO를 오래 섭취하면 유전자의 작동 양상이 바뀌고 이 변화된 특성이 결국 후손에게 전달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제기된다. 외래 유전자가 삽입된 콩, 옥수수의 안전성을 검사할 때 후성유전학의 관점에서 적극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올 수 있다.

 

현재 국내에서는 의료전문기관이 아닌 민간회사가 유전자 검사를 통해 건강정보를 알려주는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다. 적당한 샘플을 보내면 모발의 굵기나 카페인 대사 수준 등을 유전정보에 기초해 알려준다. 후성유전학의 관점에서 유전정보가 개인의 건강상태를 얼마나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래암 교수는 책의 제목에서 알려주듯 후성유전학이 리센코의 손을 제대로 들어준 것이 아니라고 진단한다. 교과서에서 거짓으로 소개된 학설이 전문가는 물론 일반 건강 문제의 관점에서 다시 조명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김훈기 | 홍익대 교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