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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오디세이

고구마와 인간의 공통점

지금 미국에서는 유전자변형식품(GMO) 표시제 시행을 두고 활발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GMO 개발 최강국인 미국은 연방정부 차원에서 표시제를 도입하지 않고 있다. 다만 몇 년 전부터 주별로 GMO 표시제를 요구하는 소비자의 목소리가 커졌고, 이르면 내년 7월부터 버몬트 주에서 표시제가 시행될 예정이다. 그러나 과학계의 전반적인 반응은 싸늘한 편이다. 안전성이 충분히 입증됐는데 굳이 소비자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표시제가 시행될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최근 외국 과학계에서 발표된 논문과 성명서에는 이런 불편한 심기가 확연히 드러나는 듯하다. 자신이 사 먹는 식품의 성분을 알고 싶다는 소비자의 요구가 과학적으로는 가치가 없어 보인다는 의미일까.

지난달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게재된 논문 한 편이 세계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인류가 8000년 전부터 섭취해온 고구마가 알고 보니 ‘자연산’ GMO였다는 것이 논문의 요지였다. 연구진은 고구마의 유전자에 엉뚱한 유전자가 끼어들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흙 속에 사는 미생물인 아그로박테리움의 유전자였다. 고구마와 미생물은 분류학상 전혀 다른 계통의 생명체이다. 미생물이 고구마와 교배할 리가 없을 텐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고구마의 진화 과정에서 미생물의 유전자가 섞여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인류가 고구마를 개량하는 동안 이 유전자가 좋은 영양성분을 만드는 방향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연구진은 이번 발견을 토대로 GMO가 이미 자연에서 만들어져 왔으며, 현재 생명공학 기술로 만드는 GMO는 통제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자연산’ GMO에 비해 낫다고 밝혔다.

얼핏 생각하면 그럴듯하게 들리는 얘기다. 우리가 현재 섭취하는 콩이나 옥수수 같은 GMO는 미생물의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삽입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니 자연에서도 유사한 일이 벌어져왔다는 것이다. 특히 아그로박테리움은 과학계에서 GMO를 개발할 때 흔히 사용하는 미생물이다. 가령 콩에 제초제에 잘 견디거나 살충성이 있는 유전자를 삽입할 때 아그로박테리움이 배달부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미생물의 유전자가 식물에서 발견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과학계에서는 유전자가 부모에게서 자손으로 전달되는 통상적인 상황 외에도 전혀 다른 계통의 생명체로 이동하는 현상이 이미 많이 보고돼 왔다. 이른바 ‘수평적 유전자 이동’ 현상이다. 지구의 많은 생명체는 오랜 진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의 유전자가 일부 삽입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식물은 물론 동물, 그리고 인간에게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2000년대 초반 완료된 인간게놈프로젝트 연구 성과에 따르면 인간의 유전자에는 상당수의 바이러스 유전자 흔적이 남아 있다. 다만 오랜 적응과 자연선택의 과정을 거친 결과 현대인의 몸 안에서 바이러스 유전자가 활동하지 않을 뿐이다. 연구진의 논리대로라면 인간도 사실은 GMO인 셈이다. 과연 그럴까.

다국적 종자 화학기업 몬산토는 2012년부터 가뭄에 잘 견디도록 유전자를 변형시킨 옥수수를 시험 재배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한편에서는 식품 외에 유전자를 변형하는 기법이 활용된 모든 제품에 표시를 하자는 움직임도 있다. 최근 독일에서 GMO 개발을 지지하는 과학자 집단이 이색 청원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유전자를 변형한 미생물을 이용해 생산한 의약품, 또는 GMO 사료를 먹고 자란 가축 등에도 표시를 하자는 것이다. 정육점에 진열된 소고기와 돼지고기에 GMO 사료의 섭취 여부를 표시하자는 주장에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에서 GMO 사료가 대거 사용되기 때문에 표시가 너무 흔해질 것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의약품까지 표시하자는 주장에는 의문이 든다. 예를 들어 당뇨병 치료를 위해 유전자를 변형한 미생물로 대량 생산되고 있는 인슐린 제제에도 GMO임을 표시하자고 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상당히 많은 의약품에 GMO 표시제가 적용돼야 한다. 각종 섬유, 화학제품도 마찬가지이다.

당초 식품용 GMO에 대한 표시제 도입을 주장해온 소비자로서는 당황스러운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소비자는 그간 인류가 섭취해오지 않은 미생물 유전자가 인위적으로 함유된 식품이 무엇인지 알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청원서를 제출한 과학자들은 우리 주변에 GMO가 아닌 것이 거의 없다고 소비자가 인식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소비자의 진정한 궁금증을 무시하는 태도이다.


김훈기 |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