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원 | 서울시립대 교수·철학
과학은 흔히 ‘자연현상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와 설명을 제공하는 지식체계’라고 말한다. 자연현상들은 겉보기에 무질서하거나 임의적인 방식으로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을 깊이 분석해 보면 대체로 어떤 규칙성이나 인과관계에 따라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자연현상들이 어떻게 규칙적으로 발생하며, 그러한 규칙성을 일으킨 원인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은 자연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과학의 이 같은 설명 및 분석 능력은 인간이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하는 데 자연을 십분 이용할 수 있도록 했고,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과학기술문명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과학은 실용적인 도구에 머물지 않으며 이를 넘어선다. 과학은 인간에게 사물의 근본과 자연의 질서를 이해하는 매우 성찰적인 눈을 제공해 줄 수 있다. 과학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삶의 존재적 기반과 인류문명의 진화과정을 올바로 자각할 수 있게 되었고, 자연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반성적 계기를 갖게 됐다. 현대 과학기술문명의 비극은 과학을 비판적 지성으로서보다는 인간의 욕구충족을 위한 도구적 지식으로 주로 활용한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학으로부터 어떻게 비판적 지성의 역할을 이끌어 낼 것인가.
한 가지 방법은 메타적인 관점에서 과학을 바라보는 것이다. 과학이 자연에서 일어난 개별 사건과 현상들을 대상으로 합리적이면서 유용한 설명을 제공한다면, 과학에 대한 메타적 바라보기 곧 메타과학은 이러한 사건 및 현상들이 기반하고 있는 근본 토대와 이것들이 지니는 함의 및 영향을 중심으로 성찰적인 사유를 제공한다. 가령 원자 현상에 관한 물리학의 설명은 원자에너지를 원자력발전에 이용할 수 있는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 주지만, 원자물리학에 대한 메타적 바로보기는 방사능으로 인한 인간 및 자연 파괴의 심각함을 깨우쳐 주고 따라서 인간이 원자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와 같은 행동규범을 제시해 준다. 현대과학이 도달한 가장 깊고 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메타과학은 우주, 생명, 인간을 새롭게 투시하고 새로운 가치이념과 행동규범을 찾으려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메타과학은 과학과 가치규범을 연결하는 다리이자, 과학이 비판적 지성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도록 만드는 지적 지형이라 말할 수 있다.
물리학에 기초한 장회익의 ‘온생명’ 이론도 이러한 메타과학적 작업의 한 사례로 볼 수 있다. 현대물리학에서 본 생명이란 우주의 자유에너지 공급을 계속 받으면서 정보축적 및 자기복제를 통해 고차적인 질서를 형성해 나가는 존재이다. 여기서 자유에너지의 흐름은 어떤 유기체가 고차원적 질서를 형성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재생산하는 하나의 생명체로 존립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것 없이는 어떤 생명체도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자족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생명의 최소 기본단위를 설정할 수 있는데, 에너지의 근원을 포함하여 이의 흐름을 활용하고 있는 각 단계의 개체들로 구성된 유기체적 전체가 그것이다. 이것이 바로 ‘온생명’이다. 가장 작게는 태양-지구-인간으로 이어지는 태양계를, 넓게는 우주 전체를 하나의 온생명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자유에너지의 공급원은 개체 생명체에 필요한 물리적 환경 정도가 아니라, 개체 생명체와 합쳐서 하나의 온전한 생명을 이루는 또 하나의 생명단위가 된다. 생명의 의미와 가치가 형이상학적 차원이 아닌 과학에 기반하여 확장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더 이상 자족적인 생명단위가 아니며, 단지 온생명의 한 부분으로서 조건부적인 생명단위가 된다.
이러한 온생명 이론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는가? 한마디로 개체로서의 인간의 몸과 의식을 이기적으로 강조하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의 변화다. 현대문명의 비극은 온생명의 한 요소에 불과한 인간이 개체의 안위와 번성을 위해, 마치 암세포들이 신체의 특정 부위에서 여타 부분과의 유기적 관련성을 무시한 채로 번성하듯, 온생명을 이루는 여타 부위를 무제약적으로 점유하면서 왜곡시키고 비정상적인 번영을 구가함으로써 발생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현대문명이 처한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생명관, 인간관, 세계관의 변화가 필요하고 그 변화에 걸맞은 인간의 새로운 가치체계와 행동규범이 필요하다는 것이 바로 온생명 이론이 전달하려는 중요 메시지다.
온생명 이론은 과학이론이 아니다. 과학이 단순히 생활의 유용한 도구적 지식으로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존재적 기반을 깨우치는 비판적이고 반성적인 지성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보여주는 메타과학 이론이다. 이처럼 메타과학은 과학과 공유할 수 있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현대 과학기술시대가 요청하는 새로운 가치와 규범을 창출하려는 인문주의 작업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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