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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오디세이

‘과학자(scientist)’의 탄생

이상욱 | 한양대 교수·철학


이번 학기 교양과목 수업을 소개하면서 받은 두 개의 질문이 인상적이다. “이 과목은 과학기술 과목인가요, 철학 과목인가요?”라는 질문과, “시험이 주관식이면 어떻게 객관적인 평가를 하실 건가요?”라는 질문이었다. 첫 질문에는 이 과목은 과학기술에 ‘대한’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분석과 성찰을 수행하는 과목이므로 내용상 철학에 가깝다고 대답했고, 둘째 질문에는 서술형 문제는 객관성이 없다는 생각 자체가 편견이라고 대답했다. 


대답은 이렇게 했지만 필자가 평소 일부 동료 학자로부터 느낀 편견을 다시 체험한 것 같아 씁쓸했다. 과학철학은 철학이 아니라 과학이 아니냐고 진지하게 묻는 인문학자나, 인문학은 어차피 실험을 해서 결론을 낼 수도 없으니 각자 느끼는 바를 내세우며 갑론을박할 수밖에 없지 않으냐고 묻는 과학자를 만나기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과학(科學)은 영어 science의 번역어로 일상적인 의미에서는 물리학, 생물학 등의 자연과학(自然科學)을 의미한다. 이에 유비해서 사회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사회학, 경제학 등의 학문은 사회과학(社會科學)이라 불린다. 그에 비해 인문학(人文學)은 통상적인 의미에서는 결코 과학이 아니다. 일부 인문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과학이 아니라는 점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그에 비해 공학(工學)은 분명 과학적 연구방법을 활용하면서도 자연적 대상이 아닌 인공적, 즉 인간이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새롭게 만들어 낸 대상을 다루는 학문으로 이해된다. 여기에 더해 이들과 많은 차이를 가진 예술 분야가 설정된다.



(경향신문DB)



학문적 지형도에 대한 이 같은 상식적 이해에 기초하여 소위 ‘두 문화(Two Culture)’ 문제가 거론되곤 한다. 자연과학이 대표하는 과학적 연구방법론 혹은 세계관과 인문학이 대표하는 문화, 예술적 연구 및 세계관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무지와 갈등이 문제의 핵심으로 지적된다. 우리나라에 특수한 용어로 표현하자면, 문·이과 출신들 사이의 문화적 차이가 생산적 협동을 가로막는 문제도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융복합 학문이 강조되기도 한다.


필자는 이런 시도에는 공감하지만 처음부터 문제 설정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가 고대부터 일관된 연구전통을 가지고 발전해 온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두 문화’를 서로 소통하게 하는 것일까? 


science는 라틴어 scientia에서 유래한 단어로 19세기 초반까지 그 뜻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망라한 체계를 의미했다. 당연히 역사학도 천문학만큼이나 엄연한 과학이었다. 18세기 계몽사상가들의 백과전서 출간 노력은 이런 분과학문적 의미에서 과학(science)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분과학문의 집합체로서의 과학 개념에는 자연에 대한 지식을 찾는 노력과 인간, 사회에 대한 지식을 찾는 노력에 특별히 다른 방법론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설 여지는 없었다. 물론 이 시기에도 물리 현상에 대한 과학은 정치 현상에 대한 과학과 내용에서 달랐지만, 생물 현상에 대한 과학과 비교해서 더 많이 달랐던 것은 아니었다.


과학이 현재처럼 자연과학을 주로 의미하게 된 것은 19세기 중엽부터이다. 이 과정에서 윌리엄 휴얼이 ‘과학자(scientist)’라는 용어를 1833년 ‘발명’한 사건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휴얼은 당시 자연현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다른 분야 학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 용어를 사용하면서 자신들의 연구를 다른 연구와 차별화하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판단했다. 과학 내에서 ‘두 문화’를 창조하려는 이러한 경향은 낭만주의가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큰 영향을 끼치면서 반대 방향에서도 심화되었다. 휴얼은 이런 상황에서 예술가(artist)에 유비하여 자연 탐구에만 몰두하는 연구자를 과학자(scientist)로 지칭한 것이다. 결국 휴얼의 ‘과학자’ 개념은 과학이 통합적 성격을 거부하는 편협한 학문 태도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었다. 그런 냉소를 읽은 헉슬리와 같은 학자들은 이 용어 대신 자신을 ‘과학 지식인(man of science)’으로 지칭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다른 분과학문과의 연관성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과학자’와 ‘인문학자’가 늘어나면서 ‘두 문화’ 현상도 심화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집단 사이의 차이점을 강조하다 보면 집단 내의 차이점은 무시되기 마련이다. ‘두 문화’ 차이가 강조되면서 철학과 문학 연구 사이의 중요한 차이는 물리학과 생물학 사이의 결정적 차이와 마찬가지로 간과된다. 하지만 현재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확고한 정체성을 지닌 두 진영을 전제하는 잘못된 융복합 담론이 아니라, 흥미로운 연구 대상에 대해 수없이 다양한 분과학문이 온전한 이해를 위해 협력하는 데 원리적 어려움은 원래부터 없었다는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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