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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오디세이

생태중심적 패러다임

이중원 | 서울시립대 교수·철학

 
오늘날 환경문제는 일시적으로 겪는 여러 사회문제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온실가스에 따른 지구 온난화, 원전사고로 인한 방사능 오염, 환경 호르몬에 의한 생태계 교란 등에서 보듯 환경문제는 지구, 다양한 종의 생명체들 그리고 인간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의 근본적인 문제가 되었다. 이제는 지구에서 생존하는 존재자들의 지속가능성을 걱정해야 할 정도다. 

사실 환경문제는 자연·인간·사회가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 발전해 온 인간의 문명사 전체가 투영된 복합적이고도 총체적인 문제다. 인간중심적 세계관과 물질 우선의 가치관, 자연에 대한 기계론적이고 도구론적인 사고, 경제성장 중심의 생태 파괴적인 생산양식 및 경제구조, 인간의 무절제한 욕구 충족의 도구로서의 과학기술문명, 자연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정치·사회·교육·문화·제도 및 의식구조 등이 복합적으로 연관된 문제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심각한 환경문제들은 이 같은 기존의 패러다임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지구본에 액체상태의 물질을 흐르게 해 지구환경오염 표현 (경향신문DB)

 
 

 기존의 패러다임에는 인간중심적 세계관이 기저에 깔려 있다. 대표적인 한 예가 서구의 과학혁명을 통해 훨씬 강화된 자연에 대한 인간중심적 이해다. 근대적 자연관에서 자연은 주로 서로 분할·분리되어 상호간의 연관성이 결여된 부분들의 집합체로, 합목적적인 질서를 지니고 수학적 작동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로 이해되었다. 자체의 지향성이나 내재적 가치 없이 외재적인 힘에 의해 움직이는 생명 없는 질료이자, 인간을 위한 대상으로 사물화된 소산(所産)적 존재로 간주되었다. 현대 과학기술 문명의 발전과 그 부정적 산물로서의 환경문제의 등장 또한 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환경문제가 지니는 근본성과 총체성 그리고 심각성은 오늘의 우리에게 자연과 인간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모순관계에 주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갈등을 완화하고 나아가 근원적으로 해소하려면 기존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변화, 곧 생태중심적 패러다임으로의 변화가 필요해 보인다. 생태중심적 패러다임이 제일 먼저 담아내야 할 것은 바로 자연관의 근본적인 변화다.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기본적 사고 틀을 부분에서 전체로, 구조에서 과정으로, 그리고 개체에서 시스템으로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기존의 패러다임은 물질이나 생명체를 이해함에 있어서, 그것을 그 구성 원소들로 분할하고 그것의 성질을 그 원소들의 속성과 상호관계로 환원하여 이해하는 분할적·환원론적 방식을 중시하였다. 가령 인간의 몸에 대한 이해는 그것을 구성하는 세포 또는 DNA의 성질과 상호관계로부터 이루어진다. 전체를 부분 환원 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유한 독자성과 내재적 가치를 지닌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분할된 부분들의 덩어리 혹은 산술 합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 예로 인간의 뇌는 뇌세포들의 작용으로만 환원하여 이해할 수 없는 복합적이고 전체적인 성질들을 지니고 있다. 이제는 전체를 부분들의 합 그 이상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 자연은 구성 부분들로부터 규정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부분들에게 질서를 부여한다는 시각이 필요하다. 

또한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만들어진 결과로서의 구조(혹은 구조물)보다는 만드는 과정 자체를 중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구조는 과정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생명체의 특정한 생물학적 구조는 진화과정의 산물이다. 생명체는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고 환경에 적응하고 무언가를 터득하면서 그 구조를 지속적으로 새롭게 변화시켜 왔다. 이렇듯 과정은 구조를 형성해 내는 생산적 능력이자 밑바탕으로서 연속적인 창조의 의미를 지닌다. 과정을 바라보면 구조를 만들어 내는 자연의 복잡한 유기적 작용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인간이 이 과정에 부정적 영향을 가할 경우 그 구조물이 왜곡된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자연의 체계는 벽돌을 차곡차곡 쌓은 듯한 건물이라기보다는 서로가 유기적 관계로 얽혀 있는 복잡계의 특성을 지닌다.‘생명의 그물’이라 할 만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서로 의존하며 살고 있다. 그렇다면 개체들이 무엇인가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개체들이 무엇이건 그것들이 어떤 시스템을 형성하면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가의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 인간이라는 개체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벗어나서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오히려 시스템이 개체들을 만들고 개체들 간의 상호관계를 규정하고 통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같은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볼 때 자연 안에서 모든 생명체들은 평등하다. 인간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생물의 생존권을 포함한 생태계의 자존권은 동등하게 존중되고 인정되어야 한다. 자연은 더 이상 인간의 행복한 삶을 위한 도구적 존재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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