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진석 | 인천대 교수·컴퓨터공학
1986년 필자는 난생 처음으로 IBM PC XT라고 불리던 개인용 컴퓨터(PC)를 거금 100만원을 주고 구입했다. 이 PC는 최초의 16비트 컴퓨터로 마우스는 없었고, 8086이라고 부르는 중앙처리장치(CPU)와 640킬로바이트의 주기억장치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가 2개 달려 있었는데, 위에 있는 것을 A: 라고 부르고, 아래에 있는 것을 B: 라고 불렀다. 프로그램을 작성할 때는 A: 드라이브에 컴파일러라고 부르는 소프트웨어를 넣고, B: 드라이브에 데이터를 저장하는 디스크를 넣은 다음 작업을 했는데, 플로피 디스크라는 것이 매우 불안정했기 때문에 밤새워 작업하던 숙제를 날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러다 열심히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세운상가에 가서 20메가바이트 하드디스크를 사온 날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하드디스크의 가격은 20만원 정도였다고 기억하는데, 지금 20만원이면 20메가바이트의 10만배에 달하는 2테라바이트 이상의 하드디스크를 구입할 수 있다. 이 당시 하드디스크는 두 개의 플로피 디스크 다음이라는 의미로 C: 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이 시기의 호칭이 관행으로 굳어져 플로피 디스크를 사용하지 않게 된 요즘에도 하드디스크는 A: 가 아니라 C: 부터 시작하고 있다. 하드디스크를 사용하게 되면서부터는 밤새워 한 숙제를 날리는 일이 줄어들게 됐다.
16비트 컴퓨터인 IBM PC XT가 나오기 전에는 8비트 컴퓨터인 애플사의 Apple II라는 PC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PC의 주기억장치가 IBM PC XT의 10분의 1인 64킬로바이트라고 해서 성능도 10분의 1이겠지 하고 우습게보면 안 된다. 그 당시 유행하던 로드 러너(Lode Runner)라는 게임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이 게임에 빠져서 시험을 보러 가지 않아 낙제한 후배도 있었다.
대형컴퓨터 (경향신문DB)
PC가 없는 학생들은 숙제를 하기 위해 중앙전산원에 있는 대형 컴퓨터를 사용했다. 그런데 말이 대형 컴퓨터지 성능은 현재 사용하는 PC보다 못했기 때문에 수십 명이 사용하면 실행 속도가 매우 느려져서 사용하기가 매우 불편했다. 프로그램을 실행 파일로 만드는 과정을 컴파일이라고 부르는데, 수십 명의 학생들이 프로그램을 컴파일하려면 1시간 이상이 소요되곤 했다. 컴퓨터 화면에 커서만 깜빡깜빡하면서 1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그래도 당시에 수업을 듣던 학생들은 숙제의 마감시간을 넘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면서 요즘처럼 좋은 환경에서도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은 선배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협박도 해 보지만 그리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대형 컴퓨터가 많이 팔려서 대형 컴퓨터를 만드는 회사들도 많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PC의 위세에 눌려서 대부분의 대형 컴퓨터 제조사들이 문을 닫고, IBM과 HP 두 회사만이 겨우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최근 클라우드 컴퓨팅이라는 새로운 기술의 등장과 함께 대형 컴퓨터 수요가 증가하면서 그동안 인고의 세월을 견뎌 온 IBM과 HP가 예상치 못한 호황을 맞고 있다.
IBM PC XT의 다음 모델은 IBM PC AT라고 부르는 것이었는데, 이 PC는 80286이라는 중앙처리장치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후에 출시된 모델은 80386, 그 다음 모델은 80486이라는 중앙처리장치를 사용했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은 XT나 AT 등의 구체적인 모델명 대신 286, 386, 486이라는 중앙처리장치 번호를 컴퓨터의 모델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문득 현재 정치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386세대라는 말이 오버랩 된다. 참신하고 패기 있고 열정이 넘치는 정치인을 의미하던 386세대라는 용어가 이제는 구시대의 정치 유물이 되고 있으니 세월이란 것이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발전만을 거듭해 오던 PC였지만 PC의 아성을 위협하는 새로운 도전자들이 등장해 앞날을 기약하기 어려운 처지가 됐다. 사람들은 이제 본체에 모니터와 키보드, 마우스가 달려 있는 전통적인 형태의 PC보다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 등의 휴대용 단말기를 점점 더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클라우드 컴퓨팅의 등장으로 대형 컴퓨터의 수요도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앞으로도 이렇게 큰 것은 더 커지고 작은 것은 더 작아지는 추세가 계속된다면 PC의 설 땅은 점점 더 좁아질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MIT 미디어랩의 니콜라스 네그로폰테(Nicholas Negroponte) 소장의 예언대로 한 대의 컴퓨터를 100명의 연구자가 쓰던 시대에서 한 사람이 100대의 컴퓨터를 사용하는 시대로 변화했다는 것을 몸소 실감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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