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원작자로 유명한 노라 에프런은 영화 시나리오 외에 에세이, 소설, 칼럼, 블로그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든 다재다능한 저널리스트였다. 작고하기 몇 년 전 쓴 자전적인 에세이에서 에프런은 자신이 어린 시절 시를 좋아하던 전형적인 문학 소녀로 신문 기사나 에세이는 순수문학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편견이 일거에 무너진 계기가 있었다.
에프런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시카고대학 총장이 학교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자 작문 선생님이 그 소식을 학교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으로 표현하라는 숙제를 냈다. 에프런은 열심히 총장 방문 일정을 조사해서 방문 취지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내용으로 만들었다. 나름 심혈을 기울인 터라 선생님의 칭찬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정작 선생님이 고른 글은 다른 학생의 헤드라인이었다. 영어로 딱 네 글자, “No Class on Thursday(목요일은 휴업)”였다.
그러니까 총장 방문으로 수업이 취소되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인데 그게 바로 신문 기사 헤드라인의 핵심을 찌른 것이었다. 즉 학교 신문의 주독자인 학생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유수 대학 총장이 학교를 방문해 무얼 하느냐가 아니라 원님 덕에 나발 부는(총장 방문 덕분에 수업을 안 들어도 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에프런은 글이란 것이 얼마나 강력한 표현의 힘을 갖는지 깨닫게 되었고 저널리스트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술회한다.
흔히 과학을 기초와 응용 연구로 나누는데 여기에는 기초과학의 순수성에 대한 무의식적인 우월감이 스며들어 있다. 요즘은 기초연구로 불리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순수(pure)과학이라는 용어가 유행했다. 그럼 순수과학이 아닌 다른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불순한(impure) 과학’을 하는가. 참고로 사회학자 스티브 엡스타인이 쓴 동일한 제목의 저서는 에이즈 연구를 둘러싼 일반 시민과 전문가의 신뢰성 확보 경쟁과 함께 에이즈 치료활동가들이 소위 일반인의 전문성(lay expertise)을 획득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시나리오 작가겸 영화감독 노라 에프런_AP연합뉴스
분류는 모름지기 자신과 타자를 구별하는 데서 시작한다. 순수과학이란 용어를 쓰게 되면 순수과학이 아닌 것을 분류하는 용어가 우스워질 뿐만 아니라 노골적으로 열등하다는 인식을 초래하기도 한다. 따라서 점차 순수과학보다 기초과학이라는 좀 더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아무튼 기초와 응용의 이분법은 과학정책의 근간을 이루는 분류인데 미국 과학정책의 초석을 놓은 바네바 부시는 2차 세계대전 직후 루스벨트 대통령의 요청으로 작성한 보고서, ‘과학, 그 끝없는 프런티어’에서 기초연구가 궁극적으로 응용 개발로 이어져 과학이 끊임없이 새로운 혜택과 가치를 창출하는 선형모델을 제시했다. 실제 과학 연구는 선형모델처럼 기초 다음에 응용, 그 다음에 개발 등 단선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한계가 분명 존재한다. 그런데 선형모델의 더 큰 문제점은 기초과학자가 연구만 잘하면 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사회적 혜택은 기초가 아닌 응용단계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기초과학자는 자신의 연구가 갖는 의미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기초 연구자는 소설가이지 저널리스트가 아니다. 문제는 뉴턴이나 다윈, 라부아지에 등 부유했던 근대 과학자와 달리 현대 과학자는 자기 돈 들여서 취미로 과학을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후자는 정부나 산업체의 연구비를 지원받아 연구를 수행한다. 에프런의 에피소드에 비유하자면 세금을 내는 시민이나 주식을 사는 주주들에게는 총장(과학)이 무얼 하는지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총장(과학) 때문에 무슨 좋은 일이 생길지가 중요하다.
현대 의학의 기틀이 된 세균이론을 확립함(기초)과 동시에 백신 개발(응용)로 의사보다 더 사람을 많이 구한 루이 파스퇴르에 따르면 기초과학과 대비되는 응용과학이란 따로 없다. ‘응용과학(applied science)’이 아니라 ‘과학의 응용(applications of science)’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과학은 모두 기초과학이고, 응용과학자만이 아니라 모든 과학자가 잠재적으로 과학의 응용에 대한 헤드라인을 요구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헤드라인이 구구절절일 필요는 없다. 자기 연구를 지원해준 이들에 대한 배려를 창의적으로 한 줄에 나타낼 수 있으면 족하다. 물론 그것이 절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세상에 공짜란 없지 않은가.
김소영 | 카이스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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