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이 점입가경이다. 민주당 후보로 급진적 개혁을 부르짖는 버니 샌더스의 약진도 대단하지만 역시 백미는 거침없는 문제발언에도 불구하고 공화당 경선에서 절대 우위를 점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를 지켜보는 일이다. 우리나라도 선거를 앞두고 있기에 미국 유권자들이 양당 후보자들의 언동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살피는 것도 흥미롭다.
여기서 ‘과학적’ 분석이란 과학적 방법을 동원해 미 대선 후보자들의 언동을 연구, 나름의 결론을 도출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이런 분석이 과학 ‘지식’이 되려면 일정한 형식을 갖춘 ‘논문’으로 쓰인 후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검토해 출판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야 한다. 이것이 개별적으로 수행된 과학 연구가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과학 지식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미 대선에 대한 이런 의미에서의 과학 지식도 많지만, 필자가 주목하는 내용은 과학적 방법을 활용해 트럼프 현상에 대해 분석한 사례들이다.
트럼프는 말을 잘한다. 혹은 적어도 그를 지지하는 수많은 미국 유권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트럼프의 말을 꼼꼼하게 분석해보면 그가 말을 잘하는 방식이 미국 정치인들 대다수와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힐러리 클린턴 같은 주류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말 한마디가 논평자들이나 언론에 의해 인정사정없이 분석돼, 오해를 살 만한 말은 반대파의 공격에 사용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단어 선택이나 표현에 신중을 기하며 공공장소에서 난처한 질문을 받으면 자신의 기존 입장과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최대한 꼬투리 잡히지 않게 말하려 노력한다. 그러다보니 관련 사안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는 왠지 진실해 보이지 않고 유식한 척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그에 비해 트럼프는 일단 어려운 어휘나 긴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최근 유튜브에서 300만건 이상의 조회를 기록한 한 어절 분석에 따르면 4음절 이상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문제’나 ‘해결’처럼 간단한 단어를 지속적으로 반복하고 특유의 흥을 돋우는 어조로 문장의 맨 끝에 이런 단어가 배치될 수 있도록 문장 구조도 엉터리로 바꾸어 버린다. 그래서 트럼프가 한 말을 문장으로 옮기면 영어 선생님들이 고쳐주고 싶어 안달 날 괴상한 문장투성이다. 트럼프의 연설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최근 언어학적 연구에 따르면 그의 작문 실력은 초등 4학년생 수준으로 비교 대상이 된 정치인 중 꼴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가 연설을 하고 있다_연합뉴스
이게 뭘 의미할까? 트럼프의 인기는 사람들이 많이 배운 사람들을 싫어하기 때문인가? 자신들이 말하는 방식과 비슷하게 말하는 소위 ‘서민적인’ 대통령 후보를 원하기 때문인가? 그렇게만 보기는 어렵다. 미국인의 평균 학력이 초등 4학년은 아닌 데다가 개인이 평소에 트럼프처럼 말하고 다니다가는 당장 사회적으로 난처한 상황에 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트럼프 인기의 비결은 뭘까? 탁월한 세일즈맨으로서의 능력이다. 재능 있는 세일즈맨일수록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특유의 구성진 어조로 반복하면서 잠재적 고객을 홀릴 줄 안다. 정말 능력 있는 세일즈맨이라면 북극에서 에어컨을 팔고 열대에서 난로를 팔 수도 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점은 판매에만 열중인 세일즈맨은 자신이 파는 상품이 고객에게 정말 필요한 것인지 여부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홀려 무리하게 주택을 산 사람은 결국 파산할 수도 있다.
여기에 트럼프 현상의 교훈이 있다. 유권자가 평소 하기 어려웠던 말을 시원스럽게 대신 해주는 트럼프는 용기 있고 능력 있는 인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국방, 경제, 외교, 인종 문제 등에 대해 다른 정치인들이 트럼프처럼 간단명료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런 문제가 정말로 어렵고 복잡한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를 가볍게 농담하듯 이야기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그를 지지했던 미국 유권자들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빚을 떠안고 집을 산 사람 꼴이 될 수도 있다.
얼마 안 남은 우리 총선도 마찬가지다. 유권자들은 ‘저 사람 괜찮네!’ 식의 감정적인 선택을 하기보다는 그가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나라 전체와 나에게 어떤 영향이 올지를 나름대로 ‘과학적’으로 따져본 후 투표를 해야 한다. 이런 분석을 하는 일이 머리 아프고 힘들 것이고 늘 하던 대로 혹은 감정적으로 선택하는 일이 더 쉽겠지만, 이성적으로 찬찬히 따져보지 않고 내린 선택이 가져올 결과가 자신과 나라 전체에 바람직하지 않으리라는 점은 과학적으로 충분히 예상가능하다.
이상욱 | 한양대 교수·과학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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