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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오디세이

과학은 재미있는 노동

이상욱 한양대 교수·철학
 
영국 런던에 자리잡은 왕립연구소는 1825년부터 매년 청소년이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크리스마스 과학강연을 베풀어왔다. 이 강연 시리즈는 전기와 자기에 대한 독창적 연구로 전자기학의 기초를 놓은 걸출한 자연철학자 마이클 패러데이가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잠시 중단된 것을 제외하면 왕립연구소의 크리스마스 강연은 매년 빠짐없이 참여자들에게 과학의 흥미진진한 세계를 소개해왔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 강연의 역대 연사진의 면면만 봐도 화려하다. 패러데이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이 직접 참여했고, 최근에는 ‘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 뛰어난 뇌생리학 연구로 남작 작위까지 받은 수전 그린필드, ‘털 없는 원숭이’에서 도발적인 주장을 폈던 데스먼드 모리스 등이 자신 연구분야의 현황을 어린 세대들에게 알기 쉽게 소개했다.

크리스마스 강연이 처음 시작될 때만 해도 어린 세대들이 과학에 접근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당시 강연은 젊은 세대에게 과학의 개념이나 핵심적 사실을 소개하는 역할을 주로 담당했다. 그에 비해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과학 관련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현대에는 강연의 역할과 내용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최근 강연에 나선 과학자들은 나노과학이나 로봇공학처럼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첨단 과학기술에 대해 현재까지의 성취를 요약하고 미래 연구의 전망을 제시하곤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참가 어린이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흥미로운 과학강연이 여럿 진행 중이다. 구태여 강연장을 찾지 않아도 과학의 세계를 접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초등학생 딸이 수강하는 방과후학교 프로그램에는 내가 다시 학교를 다닌다면 배워 보고 싶은 강좌들이 수두룩하다. 그중 과학 관련 강좌의 내용을 보면 학생들에게 과학 하는 ‘재미’를 전달하려 노력한 흔적이 생생하게 묻어난다. ‘생명탐구’ 강좌에서 장수풍뎅이 애벌레를 분양받아와 성충으로 키우기도 하고, ‘실험과학’ 시간에는 생활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물질로 손난로를 만들기도 한다. 바야흐로 과학을 ‘신나고 재미있는’ 것으로 알리기 위해 여러 사람이 열심히 노력하는 것 같다.

이런 노력은 이공계 위기 담론의 확산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수학과 과학에 재능 있는 학생들이 예전만큼 과학기술 분야로 진학하지 않는 대신 의치학 계열처럼 사회적으로 안정적 분야를 선호하는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다급해진 과학기술계와 정부가 각종 장학금으로 이공계에 우수학생을 유치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아마도 과학에 대한 흥미를 북돋우려는 노력 역시 이런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학문을 이끌 후속세대들에게 과학이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잘 ‘홍보’해서 경제적 유인책과 함께 제시하는 것이 미래 국가 과학기술 경쟁력 확보를 위해 필요하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수 있다.

하지만 과학이 재미있다는 점만을 강조하는 과학 ‘홍보’는 문제가 있다. 실제 과학연구는 분야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매우 ‘노동집약적’ 활동이다. 물론 과학연구가 지적 능력과 무관하게 엄청 성실하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과학연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결과를 낼 수 없는 것이 엄정한 사실이다. 이유는 대부분의 연구, 특히 실험연구는 거의 모든 경우 잘 안되기 때문이다. 깔끔하게 정리된 과학 논문 한 편마다 수백번, 수천번의 실패와 시행착오가 담겨 있다고 보면 된다. 계속해서 실패하는 실험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결과를 나오게 할 수 있는지를 알아낸 순간이 연구가 전환점을 도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 순간은 결코 쉽게 오지 않는다. 이에 이르기 위해 연구자는 머리를 쥐어짜면서 왜 실험이 안되는지, 되게 하려면 어떤 요인을 바꾸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그걸 실제로 해봐야 한다. 이런 작업은 그야말로 될 때까지 반복된다. 과학연구는 다른 무엇보다 연구자의 지적 능력, 육체적 숙련, 집착에 가까울 정도의 끈기, 목표를 이루겠다는 성취욕 등이 집약된 ‘노동’이다.

과학이 무척 재미있다는 점만 부각시켜 학생들을 유인하면 이 학생들은 실험실에서 이루어지는 엄청난 노동의 양에 질려버릴 수 있다. 미래 과학인력을 키워내기 위해서는 단순히 과학이 크리스마스 과학강연이 보여주는 것처럼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연구과정이 다양한 능력이 예술적으로 결합되는 드라마틱한 노동이며 이 노동이 의외로 중독성이 있다는 점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세대를 위한 과학 커뮤니케이션은 재미있는 과학체험에 더해 진지한 노동체험도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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