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2일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는 빛보다 빠른 입자를 발견했다고 발표해서 국제적 주목을 끌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새로운 입자가 발견된 것은 아니고, 그전까지 속도가 빛에 근접한다고 알려져 있던 중성미자라는 소립자의 속도를 보다 정밀하게 측정한 결과 빛보다 빠르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발표였다. 현대 물리학의 근간이론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질량을 가진 물질이 빛보다 빠르게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빛의 속도가 현재 알려진 물질의 한계속도이기에 이 실험결과는 관련 학계에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CERN은 자신의 실험결과에 상당한 자신을 가진 듯, 관련 세부사항을 공개하면서 다른 실험팀의 검증을 제안했다. 실험은 중성미자를 유럽 내에서 730㎞ 이동시켜 속도를 측정하는 것이었는데, 중성미자는 빛보다 60나노초(1나노초는 10억분의 1초)라는 근소한 차이로 빨랐다고 한다. 벌써부터 이렇게 작은 시간차를 재는 데 사용한 위성측정에 오차가 생길 수 있어서 이를 보정하면 중성미자의 속도는 빛보다 약간 느리게 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CERN이라면 유럽만이 아니라 전 세계로부터 몰려든 탁월한 과학자들이 함께 모여 연구하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심사숙고한 후에 발표한 내용에 대해 과학자들조차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며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학자들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대한 애착이 워낙 커서 괜한 트집을 잡고 있는 것일까?
CERN의 발표에 대한 과학계의 최종 결론은 좀 더 기다려보아야겠지만, 이 사례는 과학지식이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흔히 우리는 관찰이나 실험을 통해 얻은 경험적 증거에 바탕을 두고 어떤 이론이 옳은지를 판정하는 방식으로 과학지식이 축적된다고 생각한다. 즉 경쟁하는 두 이론 중 어떤 이론이 옳은지 결정하려면 두 이론이 서로 다른 경험적 결과를 예측하는 상황을 관찰이나 실험으로 조사해보면 된다는 것이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이렇게 정직하게 ‘결정적 실험’의 손에 이론의 운명을 내맡기는 태도를 과학적 태도의 핵심으로 파악했다. 그는 자신이 젊은 시절 빈에서 경험했던 아들러나 프로이트의 심리학은 어떤 상황이 닥쳐도 사후적으로 적당한 이유를 대면서 이론을 구해내는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점에 불만을 품었다. 그에 비해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일반상대성이론이 옳다면 개기일식 때 평소에는 태양에 가려 보이지 않던 별빛이 뉴턴역학의 예측보다 대략 두 배만큼 더 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천문학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검증해 보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포퍼는 이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론적 주장을 확실히 제기하고 정정당당하게 경험적 ‘심판’을 받는 태도가 과학의 특징이라는 생각은 그 후로 과학자와 일반인 모두에게 널리 퍼졌다.
물론 과학지식의 성장에서 증거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앞서 소개한 CERN 실험이 올바른 것으로 판정된다면 분명 관련 이론의 수정은 불가피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무엇을 고려할 만한 ‘증거’로 삼을 것인지에는 과학자 사회의 ‘판단’이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실험을 수행한 연구자가 아무리 조심스럽게 오류의 가능성을 제거했더라도 여전히 다른 연구자에 의해 오류가 드러날 수 있다. 실제로 2008년 페르미 연구소에서도 빛보다 빠른 입자를 관측했다고 발표했는데 이후 이 실험에는 기술적 문제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게다가 정밀한 실험일수록 제대로 수행하기가 워낙 어려워서, 얼마나 뛰어난 실험팀이 결과를 발표했는지에 따라 학계의 판단이 달라지기도 한다. 연구자의 명성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어떤 방식으로 실험결과를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지에 대해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실제로 CERN 실험에 대한 비판 중 상당수는 실험 원자료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 원자료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다른 해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 과학에서는 동일한 실험결과를 놓고 경쟁하는 여러 해석에 대해 관련 연구자 공동체가 오랜 기간 논쟁을 거쳐 합의를 도출함으로써만 ‘증거’의 의미가 분명해질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정밀한 실험일수록 제대로 수행하기가 워낙 어려워서, 얼마나 뛰어난 실험팀이 결과를 발표했는지에 따라 학계의 판단이 달라지기도 한다. 연구자의 명성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어떤 방식으로 실험결과를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지에 대해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실제로 CERN 실험에 대한 비판 중 상당수는 실험 원자료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 원자료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다른 해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 과학에서는 동일한 실험결과를 놓고 경쟁하는 여러 해석에 대해 관련 연구자 공동체가 오랜 기간 논쟁을 거쳐 합의를 도출함으로써만 ‘증거’의 의미가 분명해질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결국 과학지식의 성장은 ‘증거’, 특히 경험적 증거에 바탕을 두지만 어떤 것을 타당한 경험적 증거로 간주할지에 대해서는 과학자 ‘사회’의 검증과 합의가 결정적이다. 과학지식의 성장은 경험적인 만큼이나 사회적이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과학자들은 자연에 실험을 통해 말을 걸 수 있고 자연은 이에 응답하기는 하지만, 대답을 듣기도 쉽지 않고 그 대답이 어떤 의미인지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의 오랜 논의와 합의 도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학오디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탈핵 시대 (0) | 2011.12.05 |
---|---|
애매함과의 싸움 (0) | 2011.11.27 |
융합형 인재를 키우자 (0) | 2011.10.17 |
부분의 합은 전체와 다른가? (0) | 2011.10.02 |
첨단 나노 기술에 웬 윤리강령? (0) | 2011.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