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

잎 없이 꽃을 피운다는 건

가을 잎이 봄꽃보다 붉다는 한시 구절을 들어가며 사람들은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을 찬탄한다. 여기서 봄꽃은 붉은 매화쯤 될 것이다. 봄의 꽃, 가을의 단풍 둘 다 ‘붉지만’ 쓰임새는 분명 다르다. 매화꽃은 벌을 불러들이지만 가을 단풍은 하릴없이 떨어질 뿐이다. 하지를 지나 낮의 길이가 짧아지기 시작하면 활엽수 잎은 푸름을 버릴 채비를 한다. 붉은 잎은 더 이상 광합성을 하지 않겠다는 식물의 결연한 선언에 다름 아니다. 이런 식물의 계절성을 열역학적으로 표현하면 ‘봄은 가을이 될 수 있지만 그 반대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정도가 될 것이다. 가을 햇빛은 화학에너지 형태(탄수화물)로 저장되지 않고 다만 잠시 단풍잎을 따뜻하게 덥힐 뿐이다. 가을은 저절로 봄이 될 수 없다. 잘린 도마뱀 꼬리가 다시 도마뱀이 되지 못하듯이 낙엽이 나무에 달라붙어 푸르게 변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사이 나무는 봄을 준비한다. 물론 내년을 모르는 초본 식물은 다음 세대를 싹 틔울 씨앗을 땅에 뿌려야 한다.

 

한층 날이 온화해졌다. 밖으로 나가보자. 그리고 주변의 나무를 가까이서 살펴보자. 지난여름에 만들어져 장차 꽃을 피울 꽃눈은 이미 물기를 머금고 있다. 남도의 화신은 도착한 지 벌써 오래다. 헐벗은 나무가 꽃을 피우거나 잎을 내놓는 데는 기온과 낮의 길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더욱 필수적인 것은 다년생 식물이 저장해 놓은 탄수화물의 양이다. 지난해 작황이 좋았던 은행나무나 감나무가 올해는 과실의 수를 대폭 줄이지 않던가? 바로 ‘해거리’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식물이 성장하는 데 필요로 하는 주된 영양소는 탄소와 질소, 그리고 인이다. 질소와 인은 밖에서 들여와야 하지만 탄소는 식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 바로 광합성을 통해서다. 식물의 잎이 푸른 이유는 광합성 공장인 엽록체(葉綠體)가 말 그대로 푸르기 때문이다. 엽록체는 태양의 빛을 여투어 자기도 쓰고 후대를 위해 저장한다. 덧붙이자면 광합성은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와 뿌리를 통해 확보한 물을 버무려서 탄수화물을 만드는 과정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생명을 유지하는 데 먹을거리가 중요하다는 점은 말할 나위가 없지만 생식에는 특히 더 그러하다. 인간을 포함한 태반포유동물은 엄청난 양의 자원을 할당해서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한다. 산모의 손발톱은 평소보다 더디게 자라고 뇌의 무게도 줄어든다. 자신의 자원을 자식에게 나눠줘야 하기 때문이다. 식물도 생식에 많은 자원을 배분한다. 평생 단 한번 꽃을 피우는 어떤 대나무는 꽃이 떨어짐과 동시에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은 까닭이다.

 

동물이 그렇듯이 식물도 그 자손이 새로운 개체로 살아남을 확률을 가장 높일 수 있는 쪽으로 자신의 생식 전략을 구사한다. 이른 봄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우는 식물의 경우를 보자. 중국의 한 연구진들은 25년간 기후에 관한 기상청의 자료를 확보한 후 그 데이터를 살구나무의 꽃과 잎이 처음 나오는 시기와 비교했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살구나무의 꽃과 잎이 낮의 길이에 의존하는 정도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이른 봄 서둘러 꽃을 먼저 피우는 식물은 태양에서 도달하는 햇빛의 양이 적을지라도 기꺼이 꽃잎을 펼쳤다. 반면 잎은 빛의 양을 좀 더 필요로 했다. 그것이 꽃을 먼저 피우는 식물의 생식 전략이다. 이렇듯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우는 식물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매화, 산수유, 진달래, 개나리, 벚꽃, 목련 그리고 과실나무인 살구, 복숭아 등이 그런 예이다. 우리는 이렇게 추론할 수 있다. 남보다 서둘러 한꺼번에 꽃을 피우면 수정을 매개하는 이른 봄날의 곤충을 선점할 수 있다고. 맞는 말이다. 또한 잎이 없기 때문에 꽃가루가 날아가는데 방해를 덜 받는 이점도 누릴 수 있다.

 

낮의 길이는 특정 지역에 쏟아지는 태양 에너지의 양으로 환산될 수 있다. 문제는 낮의 길이가 절기와 위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이다. 지표면에 쏟아지는 광자라 불리는 빛 알갱이 100개 중 하나만이 광합성을 하는 데 사용된다고 한다. 나머지는 지구를 덥히거나 하릴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 하나의 빛 알갱이가 지구 생명체 대부분을 먹여 살린다. 식물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식물이 생산한 먹을거리를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른 봄이 아닌 여름이나 가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은 잎이 생산한 탄수화물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다. 그에 비해 봄에 서둘러 꽃을 피우는 나무는 작년에 저장해둔 에너지 말고는 여유가 없다. 그것도 겨울을 나느라 일부 써버렸다.

 

잎 없이 꽃을 피우는 행위는 자체로 무척 위험한 아름다움이다. 광합성 공장이 없기에 벌에게 제공할 꿀도 많이 만들 수 없다. 하지만 비록 적은 양의 꿀일지라도 벌은 먼 거리 날갯짓을 마다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이른 봄 식물과 동물이 춘궁기를 넘기는 방식이다. 이런 ‘생물학적’ 안타까움은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모든 식물의 공통된 운명이다. 이들은 추위와 낮의 길이를 감지할 수 있는 생체 시계(biological clock)를 효율적으로 가동하여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데 최선을 다한다. 지난해에 여투어 두었던 자원을 총동원하면서 잎보다 먼저 꽃을 피운 식물은 봄을 맞이하는(入) 대신 굳건히 세운다(立). 소리 없이 그러나 우쭉우쭉 봄을 세운다(立春).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