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다저스의 투수 류현진이 구사하는 빠른 슬라이더가 장안의 화제다. 류현진은 빠른 직구에 이은 세컨드 피치로 체인지업을 사용해왔다. 타자들이 그의 투구 패턴에 익숙해질 무렵 그는 빠른 슬라이더를 세컨드 피치로 들고나오면서 메이저리그 타자들 사이에서 상대하기 까다로운 투수로 확실하게 인식되어 가고 있다. 후반기 첫 등판에서도 류현진은 19개의 빠른 슬라이더를 사용하면서 고비마다 타자들을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내가 처음 변화구를 배운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여느 때처럼 친구들과 축구도 하고 야구도 하면서 놀고 있었다. 우리가 노는 모습을 자주 지켜보던 아저씨가 있었다. 하루는 나한테 다가오더니 자기가 한때는 야구선수였다고 소개하면서 변화구 던지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낯선 사람의 호의가 조금은 무서웠지만 야구에 매혹돼 있던 나는 그 아저씨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 직구를 던질 때와 변화구를 던질 때 어떻게 공을 잡아야 하는지 친절하게 가르쳐주셨다. 머리로 원리를 이해는 했지만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야구공은 컸고 내 손은 공을 제대로 던지기에는 아직 너무 작았다. 담벼락을 연습장 삼아 공을 던지고 또 던지길 반복했다. 희미한 가로등 아래서도 연습을 했다. 공을 손에 쥐고 자는 날도 많았다. 덕분에 나는 어린 나이에 동네 야구팀의 에이스 투수로 등극했다. 내가 던지는 변화구는 ‘마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당시 전국 최강을 자랑하던 학교 야구팀의 코치로부터 정식으로 야구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내 투구 폼을 교정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야구공 잡는 법도 체계적으로 다시 배웠다. 내 손도 그 사이 많이 커졌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정식 야구 코치보다 동네 아저씨가 더 큰 인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야구에 매혹돼 갈망하던 바로 그 시기에 도움을 준 이름 모를 동네 아저씨야말로 내 인생 최고의 야구 코치로 각인돼 있다.
천문학자가 되고 천체 관측을 하기 위해 여러 천문대를 방문했다. 보통 천문대는 인공 불빛이 없고 고립된 척박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밤하늘에서는 별들이 쏟아진다. 천문대에서 관측을 하는 사이에 짬이 나면 나는 밖으로 나가 벌렁 드러누워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을 즐기곤 했다. 천문대에서 본 밤하늘의 별들은 늘 내 가슴에 새롭고 벅찬 느낌을 꽂아놓곤 했다. 그런 황홀한 순간마다 대성리 강변에서의 밤하늘이 겹쳐 보였다.
별이 가득한 '은비령' 밤하늘 모습 (출처 : 경향DB)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학원을 운영하시던 부모님 지인의 별장이 북한강변 대성리에 있었다. 여러 가족이 어울려 그곳으로 여름휴가를 갔었다. 낮에는 강물에서 멱을 감고 모래사장에서 뛰어다니면서 놀았다. 내 또래의 여자아이도 둘이나 있었다. 한 아이는 좀 통통하고 사교적이고 볼륨감 있었고 다른 아이는 키가 크고 삐쩍 마르고 까무잡잡했다. 나는 키가 큰 아이에게 마음이 끌렸다. 밤이 되었다. 모래사장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같이 노래도 부르고 수건돌리기 게임도 하고 놀았다. 모닥불이 다 꺼지고 아이들이 부모의 손을 잡고 숙소로 돌아갔다. 나는 혼자 남아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모닥불 옆에 누워 별을 보고 있었다. 별이 쏟아졌다. 별자리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별들이 뭉치가 되어서 떨어질 듯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내가 정말 우주를 날아다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흥이 몰려왔다. 생각보다 먼저 마음이 움직였고 마음보다 먼저 가슴이 뛰었다. 아직 식지 않은 모래에 기댄 등이 따뜻했다. 모닥불의 잔열이 뺨을 발그레 달구었다. 나는 깜빡 잠이 들었다.
하지만 꿈에서 쏟아지는 별들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비몽사몽 하면서 쏟아지는 별에 빠져 있었고 흠뻑 젖어 있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눈을 떴지만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들은 여전했다. 그런데 느낌이 좀 이상했다. 내가 기다리던 마른 아이가 아니라 통통하고 육감적인 아이가 내 곁에 누워 있는 것이었다. 내가 잠에서 깬 것을 확인하고는 머리 위로 흐르는 은하수를 시작으로 백조자리 전설이며 직녀성이며 견우성 이야기를 종알종알 쏟아냈다. 하마터면 나도 덩달아 돌고래자리 이야기를 꺼낼 뻔했다. 수줍음을 많이 타던 나는 그냥 마음속으로만 그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 이야기를 들려줬지만 나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별은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별을 바라보다 우리는 또 말없이 헤어졌다. 여러 천문대를 다니면서 황홀한 밤하늘의 별들을 많이 만났지만 내 마음속 최고의 밤하늘은 여전히 그리고 변함없이 그날 대성리 강변에서 만났던 쏟아지는 별들이다. 소녀들이 그리운 밤이다. 그 아저씨가 그리운 밤이다. 강변으로 가자. 별이 쏟아지는 강변으로 가자.
이명현 | 과학저술가·천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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