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과학계 앞얘기, 뒷얘기/임소정의 '사이언스 톡톡'

환자는 의사의 적이다?


운동선수처럼 보이는 겉보기 등급과 달리 자주 골골대는 나는 평소 병원에 가는 것을 서슴지 않는 편이다. 하루만 화장실을 못 가도 CT촬영까지 감행하신다는 울 아버지의 건강염려증과 행태는 비슷하지만 원인은 정반대다. 아버지는 칠십 평생 꾸준히 새벽운동(요즘은 무려 새벽 2시에!)을 해왔다는 자신감 때문에 조금만 아파도 크게 놀라시는 거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운동이라곤 장운동밖에 안하는 관계로 병이 생기면 키우지나 말자 하는 생각에서 병원을 찾는다.

그러나 병원에 가서 상처를 얻어오는 경우도 있다. 의사가 환자에게 버럭 화를 내거나 야단을 치는 상황 말이다.

콧물이 심해져서 “알러지성 비염이 있는데요”하면 “흥, 알러지 검사는 해보고 말씀하시는 거에요?”라는 이비인후과 의사. (학교 보건소에서 콧물이 줄줄 흐르는 내게 처음 알러지성비염이라며 약을 줬으니 나는 그저 그렇게 알고 있을 밖에.)

얼굴에 뭔가가 쫘악 깔렸는데 “음식을 잘못 먹어도 얼굴에 뭐가 날 수 있나요?”했다가 “냉장고도 없는 조선시대에 살고 있는 줄 착각하시나본데, 잘못 먹어서 뭐가 나는 사람은 10명 중 1명에 불과하거든. 근데 왜 10명 중 9명이 뭘 잘못 먹었다고 말하니 나 원...”이라며 나머지 8명분의 화까지 내게 퍼붓는 피부과 의사.

환자가 모르고 하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알려주면 될 것이지 왜 화를 내는 걸까. 혹시 옷가게 같은 곳에서도 종종 무시당하는 나의 억울한 외모 탓일까. 수수하다 못해 어수룩해 보이는, 울언니 표현으로는 “좀 없어보인다“는 내 외모가 의사들의 폭언을 부르는 걸까.

그러나 꽤 참한 외모의, 현재 대학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가정의학과 전문의 친구가 자기가 갓 인턴을 마치고 레지던트를 시작하던 시절에 겪은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감기 때문에 병원에 가서 “가래도 좀 생기는 것 같다”고 했더니 “흥, 가래라니. 콧물이 넘어가는 것도 구별 못하나요?”라고 야단을 치더란다.

의사들은 가끔 왜 이렇게 환자를 무시하는 걸까. 국가시험을 보고 보건복지부장관에게서 면허를 받지도 않은 환자로서는 병에 대해 모르는 게 당연하고, 가끔 무식한 질문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왜 우리는 가끔 환자들의 질문에 관대하지 않은 의사를 만나는 걸까. 독일의 의사 출신 저널리스트 베르너 바르텐스가 쓴 <젊은 의사가 고백하는, 읽기 두려운 메디컬 스캔들(2008)>을 보면 의사들이 왜 그러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베르너 바르텐스 지음, 박정아 옮김, 13500원, 알마

환자가 불안한 목소리로 “선생님, 전 죽게 되나요?” 라고 질문했을 때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습니다”라고 쿨하게 대답했던 의사. 그는 환자들에 대한 스스로의 냉소적 태도를 깨닫자 몇 달 뒤 사직서를 냈다. 책의 저자인 바르텐스의 이야기다.

그는 동료들도 환자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구가 많은 환자와 질문이 많은 보호자는 의사와 간호사의 일상을 위협하는 성가신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가 ‘자기방어적’으로 행동함에 따라 의료종사자들이 환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기본적 사실이 간과되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환자들에게 둔감해진 의사들은 때로는 환자를 조롱하고 비웃거나, 환자 가족의 질문을 피해 달아나곤 했다. 그들은 노인에게는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가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환자를 나무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고, 잘못된 치료를 해도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승모판탈출’ ‘자극성 심장수축’ 등의 어려운 용어를 쓰는 것이 환자를 불안하게 만든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거나, 환자의 민감한 신체부분에 대해 모욕적인 말을 퍼붓고도 상대가 수치심을 느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대장 조영촬영 이후 불가피한 가스배출로 인해 수모를 당한 수녀가 헐벗은 몸으로 복도를 뛰어가며 울음을 터뜨린 이야기와 샤워부스처럼 칸막이로 나눠진 진료실에서 옆 환자의 개인적인 부분에 대한 적나라한 이야기를 들어야하는 ‘수치심을 주는 진료’ 이야기를 보면서는 요즘 자주 가는 이비인후과가 떠올랐다.

이 곳은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가면 다음 순서의 환자가 진료실 앞 의자에서 대기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진료실이 문 없는 개방형태라는 거다. 이비인후과에서 하는 진료가 옷을 걷어올리거나 하는 일은 드물겠지만, 다른 환자의 개인적 병력과 상태를 고스란히 들어야한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의사선생님이 친절하신데다 나는 소심하고 무식한 환자일 뿐이라서 차마 이런 건의를 할 수 없다는 거다. 분명히 내 사진인데도, 비용을 다 치렀는데도, 다음에 다른 병원에서 검사를 줄일 수 있게 "내 X선 사진 달라"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비단 독일의 사례라고 생각할 수만은 없는 의료사고도 눈길을 끈다. 유방암 치료 후 뇌하수체에서 암이 발견된 여환자의 경우엔, 신경외과 의사의 무신경함 때문에 암과 무관한 증상으로 사망에 이르렀다. 의사는 방사선치료 후 코티손을 처방하면서 위벽보호제를 함께 주지 않았고, 복용량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환자는 담당의사에게 연락을 취하려 했지만 수술중이거나 퇴근해버린 의사에게 연락이 닿지 않았다.

과하게 복용한 코티손은 급성궤양을 일으켰고 그녀는 구토를 하고 열이 올랐다. 병원에서는 그녀가 암이라서 그렇다고만 생각했다. 입원해있던 주말 내내 그녀의 단단하게 굳어진 복부를 만져본 의사는 한 명도 없었다. 그저 메스꺼운 위를 다스리는 약과 진통제만을 처방했을 뿐. 월요일에 나타난 신경외과의가 뒤늦게 심각성을 깨닫고 암전문의를 불렀지만, 저녁에 찾아온 암전문의는 1시간 전에 체크한 70/50이라는 저혈압을 발견하고 쉽지 않은 상황을 예감했다. 급성출혈로 인한 쇼크상태인데도 저 낮은 혈압수치조차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던 것. 

결국 그녀는 입원한지 만3일째, 수술실에 들어간지 수 분 만에 죽었다. 의사는 마치 그녀가 암이 있기 때문에 오래 살지 못했을 것처럼 말했다. 그녀가 암이 아니라 의사의 부주의 때문에 죽었는데도.

제왕절개 수술 시간을 단축하려다 과다출혈로 사망하는 사례와 병원에서 환자를 거부해서 헬리콥터가 하늘을 헤매는 이야기도 등장한다. 요양시설에서 거들기 어려운 환자들을 다른 병원으로 보내기 위해 환자의 수분부족을 유도한다거나, 금요일마다 환자들로 ‘폭탄돌리기’를 하며 다른 병원에서 의사를 잘 받아주는 사람, 안 받아주는 사람 등으로 응급실 담당들의 리스트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도 놀랍다.


주치의제도가 있지만 공공보험과 사보험이 존재하는 독일의 의료체계 탓인지, 사보험에 가입한 경우에 과잉진료를 받게 하는 사례도 눈에 띈다. 전국민이 거의 동일한 의료보험을 사용하는 우리나라의 상황과는 좀 다르겠다. 하지만 돈이 되는 환자들에게만 극진한 병원들에 대한 비판에서 의료영리법인 도입 이후의 모습이 들여다보이는 듯도 하다.

 

저자는 환자를 인간적으로 대우하지 않는 의사들의 부족한 감수성에 관련해 교육체계의 모순을 꼬집는다. 6년간 환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죽어가는 환자의 가족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교육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인데도 ‘인성’교육에 대한 인식조차 없다는 거다. 또한 교과서적 지식을 헤아리는 시험만 치르지, 간이나 복부를 촉진할 때 몇 번을 눌러야 하는지, 관절기능은 어떻게 테스트해야 하는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각자 재량에 따라 배워야한다는 것도 지적한다. 그런 교육 탓에 환자를 무시하는 의사, 진찰도 안해보고 CT부터 찍는 의사가 나온다는 주장이다. 그는 의사들에게 제발 "환자 곁에 머무는 의사가 되라"고 조언한다. 문득, 죽음을 앞둔 환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약이 아니라 '매일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쏘댕기자(트위터 @sowhat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