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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계 앞얘기, 뒷얘기/임소정의 '사이언스 톡톡'

'기적의 치료제'와 세균의 쫓고 쫓기는 전쟁

한동안 ‘나는 잠수다’ 상태였습니다. 야근과 술로 점철된 생활을 하다 보니 ‘사이언스 톡톡’에 쓸 아이템을 생각했다가 잊고 또 잊고... 그동안 유일하게 열심히 한 건 드라마 시청이었습니다. 악역배우를 향한 삿대질은 기본, 주인공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TV를 향해 말을 거는 경지에 올랐습니다. '본격 아줌마 시대'의 개막이랄까요. 덕분에 오늘은 드라마와 함께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현재 일본에서 시즌2를 방영중인 <진(仁)>이라는 드라마는 막부 말기였던 1860년대로 시간이동을 한 뇌외과의사 미나가타 진의 모험을 다루고 있습니다. 시종일관 진지한 이 의사는 열악한 환경에서 현대의술을 최대한으로 구현해 많은 사람들을 살립니다. 그 과정에서 사카모토 료마와 같은 역사 속 인물과 마주하자, 자신의 의술로 인해 죽어야할 사람이 살아 후대의 역사가 바뀌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기도 하고요. 2009년 방영된 첫 시즌이 각종 상을 휩쓸었고 이번 시즌 또한 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즌1과 시즌2. 원작만화도 아직 완결 전이라고 들은 듯합니다.



미나가타 진 선생은 당시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링거와 수술도구 등을 고안해서 치료에 활용합니다. 콜레라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에도사람들을 소금과 설탕으로 만든 ORS(oral rehydration salts)로 치료하고, 뇌나 가슴의 종양을 제거하기도 하죠. 특히 그가 만들어낸 ‘기적의 치료제’는 시즌2에서도 큰 역할을 합니다.

당시 원인도 치료약도 몰랐던 매독에 걸린 기녀를 고치기 위해 진선생이 만들어낸 이 치료제는 페니실린(penicillin)입니다. 드라마의 배경이 메이지유신 직전인 1862년 즈음인데, 페니실린이 세계 역사에 실제로 등장하는 건 1928년입니다. 무려 60년 넘게, 그것도 서양이 아닌 동양에서 최초의 항생제가 위력을 발휘한다면 일본 역사도 아니고 세계 역사가 바뀔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입니다. 주인공 진선생이 이런 엄청난 결단을 한 데에는 페니실린 즉 항생제가 없이는 치료할 수 없는 병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페니실린 합성에 성공한 드라마 속 장면. 황색 포도상구균을 녹여버린 한가운데 부분이 페니실린인 듯.


페니실린은 1928년 플레밍이 발견한 푸른 곰팡이에서 태어난 최초의 항생제입니다. 황색포도상구균이 배양돼있던 접시에 곰팡이가 피었는데 하필 그 주변으로는 균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잘 아실 겁니다. 페니실리움(Penicillium notatum) 계열의 곰팡이가 세균의 세포벽 합성효소를 억제해 세균을 녹였던 것이죠. 이 곰팡이에서 비롯된 약제가 페니실린입니다. 첫 발견자인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분리해 정제하므로써 임상에서 사용 가능하게 만들었던 플로리와 체인과 함께 194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습니다.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즈음부터 매독이나 폐렴 등 세균성 질병 치료에 활용된 것을 시작으로 ‘기적의 치료제’ 페니실린은 광범위하게 사용됐습니다. 그러나 이 기적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1950년에 접어들자 페니실린에 대한 내성을 가진 균들이 발견되기 시작한 겁니다. 세균이 돌연변이를 일으켜 항생제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저항성을 갖게 된 겁니다.

페니실린 대체제로 합성한 메티실린도 같은 신세가 됩니다. 메티실린에 내성을 가진 MRSA(Methicillin Resistant Staphylococcus aureus)가 다시 수많은 환자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기 시작합니다. 이후엔 보다 강력한 항생제 반코마이신(vancomycin)이 탄생해 바톤을 넘겨받아 세균과의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개발된 항생제 50여종 중 가장 강한 항생제로 알려진 반코마이신마저 벽에 부딛힙니다. 1996년 일본에서 발견된 반코마이신 내성 황색포도상구균(VRSA, vancomycin resistance staphylococcus aureus)은 반코마이신을 만나도 세포벽을 합성해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던 겁니다. 흔히 다제내성균이나 슈퍼박테리아라고 부르는 이 슈퍼 내성균들은 면역력이 약한 환자를 패혈증으로 인한 사망으로 이끌 우려가 높습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병원 내 감염균의 70% 이상이 한 가지 이상의 항생제에 내성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병원에는 면역력이 약한 환자들이 모여있기 때문에 더 주의가 필요합니다. 최근 국내 의료진들의 휴대전화에 슈퍼박테리아를 포함한 세균들이 득실거린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병원 내 전염에 대한 우려는 더욱 높아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작년 12월 국내 처음 발생한 카바페넴 내성 장내세균(NDM-1 CRE)에 감염된 환자들은 모두 병원 내에서 전염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반코마이신 내성 포도상구균(VRSA) VISA나 GISA와 혼용되고 있다.



이런 초강력 내성균이 생긴 이유는 먼저 말씀드렸듯 항생제 남용 때문입니다. 2010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헬스데이터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항생제 소비량은 OECD 국가 중 1위라고 합니다. 성인 1000명당 하루에 31.4명분의 항생제를 복용하고 있다는군요. 그러나 대부분의 국민들은 항생제에 대한 부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지난해 전국 20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항생제 내성에 대한 소비자 인식도>를 조사한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응답자의 72.0%가 “항생제 내성 문제가 심각하다”고 답하면서도, 전체의 절반 이상인 51.1%가 “항생제 복용이 감기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는 겁니다. 4명 중 3명은 병원치료 중 증상이 호전되면 항생제 복용을 임의 중단한다고 밝혔고요.

감기는 바이러스성 질병
이므로 세균성 감염이 동반된 경우가 아니라면 항생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항생제는 세균용이며, 바이러스에는 항바이러스제를 써야합니다. 그러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조사한 지난해 감기나 인후염 등 급성 상기도 감염에 대한 항생제 처방률은 52.12%로 나타났습니다. 4명 중 3명(73.57%)에게 항생제를 처방했던 2002년 첫 조사 때에 비하면 지속적으로 감소세를 보이고 있지만, 처방률이 80%를 넘긴 기관도 지난해 하반기 2303곳이나 됐다고 합니다. 바이러스성 감기에 걸린 환자 중 세균성 감염이 나타나는 경우는 1% 정도에 불과한 것과 비교하면 52%라는 숫자도 아직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증상이 호전되었다고 마음대로 중단하는 것도 과다복용만큼이나 항생제 내성의 원인으로 지적됩니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항생제에 참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페니실린은 교과서에서나 보는 이름이었지만, 정말 많이 쓰는 약이름이 바로 마이신입니다. 눈다래끼가 났거나 귀를 뚫었다가 염증이 생기거나 하면 흔히 "약국 가서 마이신 달라그래"라고들 이야기하지요. 이 같은 항생제 오·남용은 내성균 발생뿐 아니라 항생제 부작용과 의료비 상승까지 부르게 됩니다. 의사들도 불필요한 항생제를 과다처방했거나 복용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에서도 경고하네요. "항생제는 감기나 플루 같은 바이러스에 안 듣습니다. 항생제 먹고 쾌차하셔서 출근 빨리할 일 없어요"



항생제 오남용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문제는 남아있습니다. 동물의 성장 촉진제로 항생제를 사용해왔기 때문입니다. 영국에서는 70년대부터 이를 금지했다지만, 미국에서는 항생제 총량의 70% 이상이 병이 없는 가축(소, 돼지, 닭)에게 사료와 함께 투여하는 데에 사용된다고 합니다. 가축에서 생긴 내성 균주들이 인간을 감염시킬 수도 있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죠. 가끔 농담으로 "항생제 광어 먹으러 가요"라고 말해왔는데,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겁니다. 우리나라는 가축용 사료에 대한 항생제 사용이 올 7월부터 전면 금지한다고 합니다.

재 슈퍼박테리아의 유전자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항생제의 남용이 계속된다면 또다른 슈퍼박테리아가 계속 생겨날 것이라는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의사들은 그렇게 되면 맹장염이나 제왕절개 같은 흔한 수술도 마음놓고 할 수 없을 거라고 경고합니다. 또다른 기적의 치료제가 나오더라도, 언제 세균에게 따라잡힐지 모릅니다. 쫓고 쫓기는 세균과 항생제의 전쟁, 항생제의 패배가 인류에 가져다줄 사태를 방관할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쏘댕기자(트위터 @sowhat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