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지난 12일 파리에서 세계 179개국은 역사적인 기후변화 대응전략에 합의했다. 개도국과 선진국 사이의 이해관계가 달라 협상 과정이 순조롭지 못했고 최종 결론도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지만 아무런 결실 없이 끝났던 2009년 코펜하겐 회의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음은 분명하다. 기후변화의 심각성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국제적 공조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논평자들이 이번 파리 회의에서 확실해진 점은 이제는 화석연료로부터 탈출해 새로운 에너지원과 재생가능한 에너지원을 찾는 데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한국의 신재생에너지 분야 투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고, 전체 에너지 소비에서 신재생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도 매우 낮다. 파리협약을 준수하기 위해 이 비율을 손쉽게 끌어올리는 방안으로 정부는 원자력 발전의 확대를 고려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이 운영비용이 낮고 온실가스를 상대적으로 적게 배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후변화에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대응하려는 파리협약의 원래 취지에는 결코 부합하지 않는 과거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영국은 전후 본격적으로 자체 핵무기 개발에 돌입했다.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핵보유가 필수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1947년 컴브리아 해안가 셀라필드에 원자로를 건설하고 핵폭탄에 사용될 플루토늄을 추출해 1952년 호주 해안가에서 처음으로 핵실험을 수행했다. 그 후로도 셀라필드에서는 상업용 핵발전과 함께 핵무기와 관련된 다양한 실험이 1970년대까지 진행됐다. 영국은 서둘러 핵보유국이 되고 싶었기에 핵폐기물의 장기적 처리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당시 수많은 핵폐기물이 셀라필드 핵발전소 내의 임시 저장수조에 투기된 채로 방치됐다. 최근 공개된 셀라필드 폐기물 수조 사진을 보면, 60년이 넘은 폐연료봉처럼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이 각종 녹슨 핵발전 기계 장치와 함께 연못 바닥에 쌓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콘크리트 외벽에는 금이 가 있고 여기저기 수초가 자라고 있는 이 저장수조는 을씨년스러운 느낌마저 난다.
기후변화협약 총회에서 반기문 사무총장, 파비위스 프랑스 외교장관과 올랑드 대통령이 축하하고 있다._AP연합뉴스
워낙 고준위의 방사성폐기물이 가라앉아 있기에 그 근처를 통과한 어떤 생명체도 규정상 ‘오염원’으로 간주된다. 그러다보니 문제가 되는 것이 수조 근처에 잠시 머물곤 하는 갈매기들이다. 갈매기들의 피폭량이 많지는 않겠지만 분명히 살아있는 방사성 오염원에 해당되기에 적절한 방식으로 ‘관리’되어야 한다. 하지만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갈매기를 ‘관리’하는 일은 폐연료봉을 관리하는 일만큼 간단하지 않다. 그래서 결국 셀라필드 관리업체는 정기적으로 엽사를 고용해 오염된 갈매기를 사살한 다음 이를 수거해 커다란 냉동고에 보관한다고 한다. 얼핏 생각하면 갈매기 냉동고는 첨단 핵시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원시적 보관기술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보다 복잡한 화학적 처리도 결국에는 보관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에 단순하게 ‘얼리는’ 것이 임시방편적 해결책으로는 그만이라고 한다. 그래서 결국 셀라필드 시설 어딘가에 냉동된 채로 쌓여 있을 갈매기는 이 핵시설의 어두운 과거를 보여주는 상징물이 된 셈이다.
현재 영국이나 한국 핵시설은 셀라필드의 낡은 수조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치밀하게 관리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핵폐기물로 가득 찬 셀라필드의 저장수조는 핵무기 개발이라는 목표에만 매달린 채 폐기물 관리에 대한 장기적 안목을 가지지 못했던 1950년대 영국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당시 상황 논리를 이해해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상상만 해도 기분이 묘해지는 셀라필드의 냉동 갈매기를 가져온 선택이 현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손쉽게 온실가스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해 핵발전이 유혹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현명한 선택일 수는 없다. 파리협약의 올바른 수용은 재생에너지 활용을 적극적으로 늘리고 안전하고 경제적인 새로운 에너지원을 찾는 혁신적 과학기술 연구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것이다.
이상욱 | 한양대 교수·과학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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