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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오디세이

수학과 함께한 하루

얼마 전 건강검진을 받았다. 내 몸을 스캔하는 첨단 의료장비들을 보며 새삼 신통방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상의학과 의사는 초음파 검사가 제공하는 화면을 판독하여 장기의 상태를 세세히 설명해주었다. 내게 무의미해 보이는 흑백 화면에서 유용한 정보를 건져내는 의사를 보며 문득 나의 전문성은 무엇일까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사실 살다보면 주눅이 들 때가 많다.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들어오는 멋진 건물을 보게 될 때에도 그렇다. 내가 하는 일도 가시적으로 확인이 가능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을 좀 더 진전시키면 또 다른 깨달음을 얻게 된다. 첨단 의료장비 이면에 있는 수학의 이론, 공학적으로 안전한 건물을 설계할 때 이루어진 무수한 수학 계산, 건물의 세련된 디자인을 위해 필요한 수학의 원리, 의사와 건축가가 전문성을 쌓는 데 기반이 된 수학을 통한 사고의 힘…. 나는 문명을 떠받치고 있는 수학을 설명하고 전파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수학과 함께 하루를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마다 확인하는 일기예보는 변화 현상을 분석하는 미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일기를 예측하려면 여러 지점에서 온도, 습도, 기압, 풍속 등 현재의 대기 상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수치예보 모델에 입력하여 미래의 대기 상태를 계산한다.

이 과정에서 복잡한 편미분방정식들을 풀어야 하는데, 대개 슈퍼컴퓨터를 이용하여 근사해를 구한다. 평생 써먹지도 않을 미적분을 왜 배워야 하느냐는 볼멘소리도 나오지만, 변화를 탐구할 때에는 필연적으로 미분이 동원된다. 미분의 역 과정인 적분 역시 쓰임새가 많다. 컴퓨터단층촬영(CT)이나 자기공명영상(MRI)에서 2D 단면 영상을 종합하여 3D 입체 영상으로 재구성할 때 적분에 기초한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이용된다.

출근길에 열어 본 사진 파일에도 수학은 들어 있다. 이미지 파일은 저장 방식에 따라 비트맵 형식과 벡터 형식으로 구분되는데, 전자는 픽셀이라는 아주 작은 정사각형들을 통해 이미지를 표현하고, 후자는 점과 점을 연결하는 선을 나타내는 수학적인 식을 구해 이미지를 표현한다.





비트맵 형식인 jpg나 bmp 파일에서는 생동감있는 사실적 표현이 가능하지만 그림을 확대했을 때 이미지가 계단처럼 흐려지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그에 반해 벡터 형식으로 작업한 이미지 파일에서는 수학 식을 동원하기 때문에 그림을 확대해도 이미지가 선명하게 유지된다.

신문을 펼쳤는데, 상당히 오래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출토되었다는 기사를 접했다면 이는 지수함수와 관련될 공산이 크다.

고고학에서 시기를 추정할 때 보편적으로 쓰이는 탄소연대 측정법에서는 14C라는 방사성 원소가 이용된다. 생명체가 죽으면 탄소가 더 이상 유입되지 않고 14C의 양이 감소하는데, 그 반감기가 약 5730년이므로 유물과 함께 출토된 화석에 남아 있는 14C의 양을 측정하면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탄소 양의 변화 추이는 지수함수를 이용하여 구할 수 있다.

오후의 나른함을 달래기 위한 음악 역시 수학을 비켜갈 수 없다. 햇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다양한 색으로 분리되는 것처럼, 여러 성분으로 이루어진 음파를 파동으로 표현하면 삼각함수들을 분리해낼 수 있다.

수학자 푸리에는 주기성을 갖는 변화를 삼각함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음을 알아냈는데, 이를 푸리에 급수라고 한다. 예를 들어 가슴을 묵직하게 울리는 첼로 악기의 소리는 복잡한 파형을 이루지만 사인함수와 코사인함수를 적절히 조합하여 푸리에 급수로 표현할 수 있다.

퇴근 후 영화관으로 향했다면 역시 수학과 함께한 시간이다. 디즈니나 드림웍스와 같은 제작사가 애니메이션으로 유체를 표현할 때에는 그 형태 변화를 수학적으로 기술하는 등위집합(level set) 방법을 이용한다. <해리 포터와 불의 잔>에서 용의 입에서 불이 나오는 장면이나 <캐리비안의 해적-망자의 함>에서 거센 파도와 포말이 배를 덮치는 장면이 모두 그렇다.

수학은 사교육을 유발하고 학생들의 행복지수를 끌어내리는 주범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우리가 누리는 문명의 대부분은 수학과 맞닿아 있다. 물론 그러한 수학은 전문가만 알면 되고 일반인은 이용하고 즐기기만 하면 된다고 항변할 것이다. 그래도 이 세상의 사물이 작동하는 이면에 수학이 있다는 사실은 널리 인식되었으면 좋겠다.



박경미 | 홍익대 수학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