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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오디세이

기피인물이 된 수소폭탄의 아버지

1954년 4월28일 미국 원자력위원회가 주최한 청문회에서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수소폭탄의 아버지’ 에드워드 텔러는 각각 청문회 대상자와 반대 증인으로 만났다. 청문회의 목적은 오펜하이머가 핵 관련 기밀정보에 접근하는 권한을 계속 갖는 것이 적절한지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결론은 오펜하이머가 ‘보안 위험’에 해당하기에 접근권한을 취소해야 한다고 내려졌다. 청문회에서 텔러는 정확히 이런 취지의 증언을 했다. 그는 오펜하이머가 애국자임은 분명하지만, 원자폭탄 개발 과정에 함께 참여한 동료로서 지켜본 그의 행동과 결정은 자신이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한 후, 그가 가진 막강한 기밀정보 접근권한이 다른 사람 손에 맡겨지는 것을 선호한다고 단언했다.

오펜하이머가 적극적으로 반역행위를 했다고 의심할 수는 없지만 청문회의 본래 목적에 관한 한 그는 그다지 믿을 만하지 않다는 요지의 증언인 셈이다.

텔러의 증언이 오펜하이머에 대한 청문회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원자력위원회 의장 스트로스는, 평소 핵확산에 반대하는 오펜하이머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를 미 정부의 핵정책 논의에서 배제하기 위해 청문회를 치밀하게 준비했다. 오펜하이머의 과거 행적 중 일부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점은 1930년대부터 미 정보당국이 인지하고 있었고, 미국 원자폭탄 개발의 총책임자였던 그로브 준장조차 오펜하이머의 사소한 좌파 경력은 성공적인 핵무기 개발을 위해 무시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던 거의 모든 물리학자들이 오펜하이머의 결백을 호소한 상황에서 나온 텔러의 증언은 과학계에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평소 텔러와 가까웠던 과학자조차 청문회 이후 그와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으려 했다. ‘수소폭탄의 아버지’ 텔러는 기피인물이 된 셈이었다.



텔러_경향DB


1908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텔러는 어린 시절 고향에서 공산주의 체제의 혹독함을 맛보았다. 그 후 청년시절 독일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하면서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공포와 증오를 키우게 된다. 미국으로 이주한 텔러는 동향 물리학자 질라드가 아인슈타인에게 핵무기 개발의 필요성을 설득하기 위해 그를 찾아갔을 때 운전사 노릇을 하면서 미국의 핵무기 개발에 동참하게 된다. 그의 참여 이유는 독일이 이 가공할 무기를 먼저 개발하면 안된다는 절박함이었다.

원자폭탄 개발 과정에서 텔러는 과학 총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와 자주 충돌했다. 오펜하이머는 텔러가 뛰어난 물리학자임은 인정했지만 성격이 급하고 독선적이어서 이론연구 책임자로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해 그의 경쟁자인 베테를 대신 임명했다. 텔러는 이 결정으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고 절친한 친구였던 베테와도 멀어졌다. 또 다른 불화의 계기는 텔러가 ‘슈퍼’라고 부른 수소폭탄 개발과 관련된 것이었다. 원자폭탄 개발 초기부터 텔러는 원자폭탄이 내뿜는 엄청난 열을 이용해서 핵융합 반응을 일으켜 더 큰 폭발력을 얻는 수소폭탄 개발을 추진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대다수 과학자들은 급박한 전쟁 상황을 고려할 때 원자폭탄 개발이 급선무라 판단했고, 텔러는 이 결정에 강한 불만을 가진 채 홀로 수소폭탄 연구에 몰두했다. 그의 수소폭탄에 대한 집착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과 소련의 사이가 멀어지고 소련이 원자폭탄을 보유하게 되면서 더 막강한 무기가 필요했던 미 정부의 이해와 맞물리면서 1952년 수소폭탄 개발로 이어졌다.

수소폭탄 성공 이후 텔러는 알래스카에 수소폭탄을 사용해 항구를 만들자는 계획처럼 핵의 생물학적, 생태학적 문제를 무시한 활용방안을 지속적으로 제안했다. 텔러에 대한 과학계의 평가는 그가 자신의 개인적 동기, 즉 공산주의에 대한 나쁜 기억, 오펜하이머와의 불화, 수소폭탄에 대한 집착 등에 휘둘리면서 공적인 정책 결정에 편향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이 소련과의 핵무기 축소나 타협안을 고려할 때마다 거의 예외없이 실세 과학자문관의 자격으로 적극 반대했다. 불행한 점은 그가 매우 뛰어난 물리학자였다는 사실이다.

젊은 시절 이미 교과서에 실릴 정도의 탁월한 연구를 수행했던 텔러는 수소폭탄 개발과 정부의 핵정책 자문역에 집중하면서 제대로 된 과학 업적을 내놓지 못했다. 과학적 재능을 가진 모든 사람이 과학 연구에만 종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텔러의 경우는 정치적 권력에 대한 욕심이 더 좋은 과학을 할 수 있었던 잠재력을 앗아간 안타까운 사례임이 분명하다. 최근 북한 핵실험을 들며 핵무장을 주장하는 일부 정치인들에 대해 우리 과학계가 텔러를 반면교사 삼아 경고의 목소리를 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이상욱 | 한양대 교수·과학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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