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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오디세이

‘도우미 로봇’이 두려운 이유

어린 시절 필자에게 ‘21세기’라는 단어는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었다. 당시 구독하던 아동잡지에 펼쳐진 21세기 세상에는 까마득히 솟아오른 고층빌딩 사이로, 움직이는 도로가 가로지르고 주문대로 뭐든지 요리해 주는 음식제조기가 집집마다 있었다. 게다가 그 미래에는 환경오염이나 빈부격차 같은 골치 아픈 문제가 기술적으로 모두 완벽하게 해결된 상태였다.

21세기가 시작되고도 벌써 상당한 시간이 지났지만 1970년대 필자가 동경했던 미래는 오지 않았다. 게다가 가까운 미래에 그런 ‘멋진 신세계’가 실현될 가능성도 낮아 보인다. 환경오염과 빈부격차는 국제적으로 오히려 점점 심해지고 있다. 왜 이런 어긋남이 발생했을까? 당연히 미래를 예상하는 일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미래를 상상할 때 우리는 대개 현실의 제도적·문화적 조건을 고정시킨 채, 단순히 기술만 홀로 발전된 상황을 떠올린다. 예를 들어 1950년대 미국 미래학자들이 상상한 50년 후의 미래 거리에는 온갖 첨단기술이 다 등장하지만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하는 남성이나 노숙자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원자력으로 움직이는 지하철을 상상하는 것은 비교적 쉬웠지만, 서류가방을 들고 직장으로 향하는 수많은 여성을 상상하는 일은 훨씬 더 어려웠던 것이다.

가사도우미 로봇은 1970년대 아동잡지가 상상한 미래 가정의 또 다른 필수품이었다. 고대 로마의 귀족들이 인간 노예의 시중을 받는 사치를 누렸듯, 21세기의 사람들은 헌신적인 로봇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이 로봇은 인간이 아니기에 인간 노예와 달리 별다른 양심의 가책 없이 함부로 부릴 수가 있었다. 이런 환상적인 로봇까지는 아니더라도 21세기 우리에게 로봇 도우미는 분명 현실이다. 최근 관심을 끌고 있는 노인돌보미 로봇이나 유아학습용 로봇이 그것이다. 로봇은 수많은 첨단기술의 융복합체이다. 그런데 로봇이 원래 제작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기술의 결합을 넘어선 보다 통합적 고려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노인을 돌보는 데 기능적으로 완벽한 로봇이더라도 조작법이 너무 복잡해서 대다수의 노인들이 이해하기도 어렵다면 별 쓸모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독거노인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기에 거주하고 있는 환경이 좁고 불편할 수밖에 없는데 깔끔한 사무실 공간에서만 잘 작동하는 로봇을 보급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시작부터 잘못된 시도일 것이다. 이처럼 로봇공학자들이 기술적으로 진보된 로봇에만 관심을 기울이다보면 1950년대 미래학자들의 실수를 반복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도우미 로봇 개발에서 기술적 협업만이 아니라 인지과학이나 사회복지학과의 협업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노인은 로봇이 아니라 마땅히 사람이 돌봐야 하지 않을까? 원칙적으로는 가족이 돌보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국가가 지원하는 ‘사람’ 돌보미 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하지 않을까? 인간적인 접촉에서 소외된 독거노인을 ‘차가운 기계덩어리’에 맡기는 것은 극히 비인도적 행위가 아닐까?

영화 <로봇 앤 프랭크> (출처 :경향DB)


그렇게 느끼는 것이 언뜻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의 복지를 자신의 잣대로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1970년대 초반에 인공지능을 활용한 상담시스템이 처음 나왔을 때 상당수의 사람들이 인간 상담사보다 기계 상담사를 선호했었다. 인간에게는 창피해서 하지 못할 이야기도 로봇에게는 쉽게 하며 기분을 풀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유지하면서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약한’ 모습’을 로봇에게는 보여주기도 쉽다. 2012년 개봉한 영화 <로봇 앤 프랭크>에서는 가까운 미래의 노인돌봄 로봇이 등장한다. 처음에는 로봇에게 보살핌을 받는다는 사실에 혐오감과 창피함을 느꼈던 프랭크는 결국에는 사람 친구와는 다른 방식으로 로봇과 우정을 나누게 된다. 이 영화에 등장한 VGC-60L처럼 고도의 인공지능 로봇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로봇을 만들려는 기술적 노력은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로봇을 만들 때에는 인간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다른 존재와 상호작용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욱 | 한양대 교수·과학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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