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농과 유전자변형농산물(GMO).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용어이다. 흔히 유기농은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재배한 천연의 농산물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GMO는 특정 기능을 발휘하는 외래 유전자를 실험실에서 인위적으로 삽입해 만든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유기농에 GMO가 조금이라도 포함되면 안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유기농에 GMO가 섞여 들어가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소비자는 자신이 구매한 유기농 제품에 GMO가 포함돼 있는지 여부를 알 수 없다. 유기농의 정체성에 대한 이 같은 우려는 미국의 농업 현장에서 발생하고 있다. 현재 한국과 미국이 진행하고 있는 ‘유기가공식품 동등성 인정 협약’을 위한 논의가 주목되는 이유이다. 협약이 체결되면 미국의 유기가공식품이 한국에 수입될 때 ‘유기(organic)’라는 표시가 그대로 인정된다. 미국의 유기식품제도가 한국과 동일하거나 그 이상으로 검증됐음을 의미하는 협약이다.
미국은 유기농 분야에서 세계적인 선두주자이다. 동시에 GMO의 재배와 수출에서 최강국이다. 미국에서는 GMO 표시제가 시행되지 않기 때문에 GMO를 꺼리는 미국인들은 농무부(USDA)가 인정한 유기 표시가 붙은 제품을 선호한다. 하지만 정작 유기농을 재배하는 미국의 농가에서는 GMO의 ‘오염’으로 골치를 앓고 있다고 한다.
지난달 미국의 한 환경단체(Food & Water Watch)는 GMO가 다른 경작지에 침투함으로써 벌어진 경제적 손실을 정리해 보고서로 발간했다. 미국에서 유기농을 많이 재배하는 중서부를 중심으로 17개 주의 농부 26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였다. 응답자의 80% 이상은 GMO로 인한 오염 가능성을 걱정했으며, 60%는 상당히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의 30%가 자신의 농지에서 GMO를 발견했거나 그 존재가 의심된다고 밝혔다. 이들 가운데 절반 이상은 구매자로부터 농산물 판매를 거부당한 적이 있었다. 1년에 오염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개인당 6500~8500달러로 집계됐다. 여기에는 오염을 막기 위해 GMO 재배지와 거리를 두거나 파종 시기를 늦추는 데 따른 수확의 손실, 그리고 GMO가 섞여 있는지 확인하는 데 필요한 비용 지출 등이 포함돼 있다.
오염은 왜 발생할까. 인근 경작지로 GMO 꽃가루가 날아가거나 아예 종자가 이동할 수 있다. 실제로 오염으로 인해 미국의 유기농가에서 정부의 유기 인증을 상실한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일이다. 지난해 5월 USDA는 오리건주의 한 밀밭에서 GM 밀이 자라고 있으며 미국은 물론 한국을 비롯한 밀 수입국들에서 유통될 수 있다고 밝혔다. 당시 GM 밀이 미국에서 재배 승인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승인되지 않은 농산물이 어떻게 버젓이 자라고 있었을까. 한 가지 유력한 단서는 2000년대 초반 오리건주를 비롯한 미국 곳곳에서 GM 밀이 시험적으로 재배됐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밀의 꽃가루가 주변으로 이동해 일반 밀과 교배됐거나, 그 종자가 어딘가에서 유출됐을 가능성이 모두 제기됐다. 하지만 원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무사히 오염을 피해 재배된 농산물이라 해도 유통 과정에서 GMO와 섞일 가능성이 있다. 워낙 많은 GMO가 생산되고 있기 때문에 GMO와 비GMO를 완벽하게 구분해 유통시킬 수 없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유기 인증 표시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도가 떨어질 수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유기농은 항상 비GMO인가? 아니다. 대개 그렇다”는 표현도 등장했다. 정부도 마땅히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다. USDA가 유기 인증을 부여할 때는 농산물이나 식품을 생산하는 과정을 검토해 적격성을 판단한다. 최종 산물에 GMO가 포함돼 있는지 여부를 일일이 검사하지 않는다.
10일 국내 농림축산식품부는 한국과 미국의 일부 규정에서 서로 다른 점이 있음을 확인했으며, 이 차이를 줄여나가기 위해 5월 초 2차 협의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GMO가 유기가공식품의 재료로 사용될 가능성을 미국이 얼마나 배제할 수 있는지가 주목된다. 미국에서 GMO가 유기농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있는 현실이 먼 나라의 얘기가 아니다.
김훈기 |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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