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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오디세이

본능적 ‘공감’과 이성적 ‘계산’

타인의 상황을 자신과 같이 느끼는 공감은 인간이 가진 독특한 능력이다. 일부 동물에서도 공감이 보이긴 하지만 인간과 비교할 정도는 되지 못한다. 진화심리학자들에 의하면 공감은 오랜 진화과정에서 다듬어진 생존본능 중 하나라고 한다. 공감하는 개체는 그렇지 못한 개체보다 살아남기에 더 유리했을 것이라고 진화론은 말하고 있다. 무리에 동조하는 모습은 다른 부족의 공격에 우리 편을 불러오게 하는 기능이 있었을 것이다. 같은 인종, 비슷한 처지의 사람끼리 더 크게 공감하는 것이 그 증거다. 어려울 때 서로 도와주는 이타주의, 희생정신의 요체는 공감이다. 슬픈 영화를 볼 때, 주책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진화한 개체임을 알려주는 자랑스러운 증표와 같다.

문제는 수억년 동안 유지된 공감의 효용이 현대에 와서는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동료나 부족이 아니라 법과 제도이기 때문이다. 공감과 같은 원시기능을 떨쳐내고 꼼꼼한 계산으로 세속에 전념할 때 현대인은 생존과 번식에 더 유리해진다. 예를 들어 거지 정도의 만만한 공감 전법에 넘어갈 도시인은 별로 없다. 이 때문에 어떤 걸인들은 어린 자식을 때려 울리는 수법으로 우리들의 공감회로를 증폭시키려 한다.

전통적이며 본능적 기능인 공감의 위력이 감소하는 데 비해 이제는 계산이 더 큰 효용을 발휘한다. 누군가 뜻 모를 친절을 베풀면 공감보다는 계산에 집중해야 한다. 공감능력은 높지만 계산에 취약한 사람은 사기꾼, 양심없는 화이트칼라의 좋은 먹이가 된다. 순박한 시골 노인들이 각종 사기에 손쉽게 걸려드는 것이 좋은 예이다. 이제는 부족장의 지혜를 능가하는 인터넷이 있기 때문에 공감은 효용으로만 따지자면 손해 보는 장사다. 그런데 계산에 능한 영악한 개체도 계속 성공할 수만은 없다.

노란 리본 공감(출처 : 경향DB)


세상이 모두 순둥이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면 사기꾼이 살기에는 최고의 조건이 된다. 부딪치는 모든 사람마다 사기를 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양아치에, 사기꾼에, 폭력배라면 차라리 그들을 피해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생존에 더 유리하다. 세속에서 극심한 경쟁과 스트레스로 제 명을 단축시킬 바에야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산골에서 간결하게 사는 것이 더 우월한 생존전략이 된다. 무소유의 삶이라는 것도 따지고보면 또 다른 고차원적 생존전략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본능적 기능인 공감과 이성적 계산이 엎치락뒤치락하며 경쟁하는 과정, 즉 진화적 안정화 과정을 거쳐 사회가 발전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강도보다 건달이 더 많고, 건달보다는 순한 소시민이 더 많은 이유는 이 진화적 안정화 전략으로 설명된다. 세상이 모두 날강도들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하면 그들끼리 만날 때마다 칼부림과 같은 극단의 공격을 하기 때문에 그들은 생존경쟁에 불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세상이라면 소극적인 소시민으로 가늘고 길게 버티는 것이 유리하다. 그러다 모두가 생존에 유리한 소시민이 되면 다시 악당으로 슬슬 나타나 이익을 도모하게 되고, 이 과정은 반복된다. 결국은 날강도로 일할(?) 때의 이득과 위험이 소시민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게 되면 악당과 소시민의 비율이 균형을 잡는 진화적 안정 사회가 유지된다.

공감과 계산이 적절한 균형을 이룰 때 사회는 건강해지고 안정적이 된다. 경쟁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줄 것 같지만 공감이 필요할 때 계산이 그것을 대치하면 비극이 발생한다. 세월호 선장과 일부 선원들의 행동을 개체 단위로 본다면 최적의 계산이다. 남아있는 아이들에 대한 본능적 공감 없이 취한 계산적 최적행동이 어떤 비극으로 귀결되었는지 우리는 눈물로 보아야 했다. 사람들이 공감을 불편한 감정으로 치부하고, 각자 계산만을 추구할 때 세상은 지옥이 된다. 남은 유가족들의 슬픔에 공감은커녕 조롱으로 즐거워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자(소시오패스)를 방치하는 것은 또 다른 비극의 씨앗에 거름을 주는 것과 같다. 공감의 능력이야말로 총체적 위기에 빠진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조환규 | 부산대 교수·컴퓨터공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