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융합이라는 말이 세계적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 학문 간 융합에서부터 기술 융합, 산업에서의 융합, 융합교육과 융합인재양성, 융합문화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곳곳에서 융합이라는 말을 듣는다.
융합이란 개념은본래 전혀 다른 둘이 만나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과학기술의 관점에서 보면 일종의 강한 화학적 결합에 비유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융합이란 말이 이렇게 널리 사용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동안 학문 분야건 기술 분야건 산업 분야건 지나치게 세분화된 전문 영역들로 나뉘어 분절적으로 발전해 왔던 것과 달리, 경계를 뛰어넘는 영역들 간의 통합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창조적 발전을 이끌어 가보자는 열망 때문일 것이다. 융합이라는 말을 빌려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의 새로운 변화를 요청하는 것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지난 20세기는 전문성에 바탕한 학문의 세분화가 절정을 이룬 시기다. 주로 깊이를 강조하는 전문성으로 말미암아 학문의 세분화된 각 영역이 다루는 폭은 점점 좁아지고 학문 영역 간 경계의 벽은 점점 높아지며 그리고 상호 간 소통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인접 학문분야는 물론이거니와 가령 물리학과 같은 동일 학문분야 안에서조차 상호 간 소통이 어려워짐으로써, 타 학문 분야와의 연계성은 물론 자신의 정체성조차 매우 약해졌다.
이는 특히 과학기술 학문분야에서 더욱 심하였다. 나아가 20세기 초반 이래로 과학기술분야에서는 실증성이 강조됨으로써, 감성과 가치를 중시하는 인문학이나 예술분야와도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이러한 세분화와 단절의 역사는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소설가인 찰스 스노가 지적한 바와 같이 과학문화와 인문문화라는 이질적인 두 문화를 생성하고 고착화하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말았다.
21세기에 들어와 거세게 불기 시작한 첨단 기술의 융합에 관한 연구개발 사업은 20세기의 이러한 분과 학문 체계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면서 새로운 융합학문의 모색을 강력히 주문하고 있다. 이제 분과 학문의 전문성 대신 학문의 융합이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융합은 21세기 문명의 새로운 키워드다. 다수의 미래학자들은 “가까운 미래에는 새로운 지식과 기술 그리고 산업은 융합을 통하여 창출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어떤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는 “지구상에 새로운 물질은 더 이상 없고 새로운 융합만 존재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주장들은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지도 모른다. 의료와 바이오 그리고 기계 분야가 융합하여 인공 대체 장기를 만들고, 나노와 재료 기술 분야가 융합하여 새로운 기능성을 지닌 특정한 구조의 신물질들을 만드는 등. 실제로 인간이 영위하는 거의 모든 생활에서 활용될 수 있는 최첨단 기술인 정보기술(IT), 생명공학기술(BT), 나노기술(NT) 분야들은 최근 융합을 통해 새로운 분야(곧 NBIT)를 창출하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 인간의 생활세계 전반을 새롭게 변화시켜 가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뒷받침해 준다.
사실 과학기술 분야에서 미래학자들이 예측한 융합은 이미 부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가령 뇌와 의식에 관한 최근의 과학적 지식들은 의학, 화학, 생물학, 심리학, 언어학 등의 융합 연구를 통해 생성되고 있다. 휴머노이드를 만든 로봇기술 역시 전자제어, 재료, 기계 등 여러 분야 기술들의 융합의 산물이다.
스티븐 잡스가 아이폰을 처음 만들어 시연할 때 “애플의 모든 활동이 인문학과 첨단기술의 교차로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 말 속에서, 과학기술과 인문·예술의 융합이 새로운 미래 성장산업을 창출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세분화된 채 서로 단절되어 버린 기존의 전공 학문체계나 전문 기술 및 산업 분야에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생각과 작업들이 융합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21세기에는 융합으로 인해 20세기와는 전혀 다른 과학기술문명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융합이 가까운 미래에 그렇게 손쉽게 진행될 일은 아니다. 기술과 산업 분야에서의 융합에 실질적 바탕이 되어 줄 대학에서의 학문 간 융합이 아직도 지배적인 20세기 분과학문 전통의 영향으로 매우 더디고 힘들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통을 통해 단절과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분야를 창출하는 일, 창의성에 바탕한 새로운 교육과 연구 방법론을 확립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렇지만 과학기술 분야에서 기초와 응용 연구 간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고 있는 점, 사회 패러다임이 추격-모방형에서 선도-창조형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점, 양보다는 질을 중시하는 사회풍토는 학문 간 융합을 한층 촉진할 것으로 본다.
더군다나 국가가 앞장서서 융합기술 발전계획을 세우고, 미래융합기술포럼이나 테크-포럼과 같이 융합을 위한 소통의 장을 마련하는 일들은 더 말할 나위 없는 중대한 자극이 될 것으로 본다. 다가올 기술융합의 시대를 어떻게 능동적으로 준비해야 할 것인지를 지금 고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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