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7일 유럽연합(EU)의 집행위원회는 ‘나노과학기술의 지속가능한 연구를 위한 윤리적인 행동강령’(이하 나노강령)을 제시하고 이를 유럽연합의 모든 회원국들이 받아들여 실행하도록 권고한 적이 있다. 2년이 지난 2010년부터는 회원국들의 나노강령 이행 정도를 측정하기 위한 평가 지표를 개발하고, 나노강령의 개선을 포함하여 이것이 보다 효과적으로 이행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해 오고 있다. 오늘날 21세기 첨단과학기술을 대변하고 있는 나노과학기술의 연구·개발에 어째서 이처럼 윤리강령이 필요하고,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이의 실행을 위해 그토록 애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향신문 DB
특정한 분자적 구조와 특성을 지닌 나노물질의 제조 등 신소재 분야, 특별한 기능을 갖춘 나노소자나 메모리 반도체 제작 등 전자공학 분야, DNA나 단백질과 같은 바이오 물질 탐지 및 제어와 질병진단 그리고 생체모사 등 바이오 공학 분야, 에너지 생산의 효율 증대 및 저장장치 개발 등 에너지 분야, 그리고 대기 및 수질 오염 개선과 물의 정수 등 환경 분야 등등. 나노기술이 개발되어 적용되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다.
이런 까닭에 오늘날 나노기술은 경쟁력을 갖춘 첨단 핵심기술로 미래 산업의 핵심 성장 동력으로 인식되어, 주요 선진 국가들에서 나노기술의 연구·개발에 막대한 바용을 투자하고 있는 실정이다. 역시 세계 1위 투자국인 미국이 매년 10조원(100억달러) 규모로 지난 10년간 총 100조원을 투자해 왔고, 한국도 지난 10년간 매해 2500억원 규모로 총 2조5000억원을 투자해 온 것을 보면, 현재 나노기술 연구·개발에 어마어마한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주요 선진 국가들의 투자 내용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나노기술의 안전과 관련한 연구·개발 및 사회적 관리에 전체 대비 3~10% 정도를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직까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인공적으로 제조된 특이한 구조의 나노물질은 독성이 있을 것으로, 그래서 인간에게 노출될 경우 위험할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현재 독성과 관련한 많은 과학적 실험들이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평소 안전한 물질이라도 물질의 크기가 나노 수준으로 작아지게 되면 물질의 표면적 증가 등에 의해 독성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이유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는 수년 전부터 제조 나노물질의 독성 연구와 관련하여 국가별로 책임져야 할 대상 물질을 지정하는 등 분업적인 협업을 통한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안전 관리를 추진해 오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나노기술에 관한 한 안전 관리가 매우 중요함을 일깨워 준다. 독성이 있는 물질이라도 인간이나 환경에 노출되지 않도록 관리가 이루어진다면 인간이나 자연환경은 그것으로부터 어느 정도 안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나노과학기술의 연구·개발에 어째서 윤리가 필요하고 유럽연합의 집행위원회가 나노강령에 그렇게 애쓰는 이유가 조금은 밝혀지는 듯하다.
유럽연합의 나노강령은 공동체 전체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책임 있고 지속가능한 나노과학기술의 연구·개발 증진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 안에는 나노과학기술 연구·개발과 관련이 있는 정부, 기업, 연구기관 및 연구자, 이해당사자들이 준수해야 할 윤리적인 행위 원칙과 지침들이 제시되어 있는데, 특별히 나노과학기술의 연구·개발이 추구해야 할 인류 보편적인 가치, 연구·개발 및 제품생산 과정에서의 안전 관리 원칙, 연구·개발 활동의 투명성 및 사회적 개방 원칙, 미래 세대의 안전에 대한 책임 등이 강조되어 있다.
나노과학기술이 경제 성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할지라도, 안전 문제 등 사회와 자연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면 보다 안전하고 책임 있는 연구·개발 활동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나노물질이 인간 및 자연환경에 미치는 위해성이 어느 정도인지 아직은 불확실하다 할지라도, 그 개연성이 과학적으로 가능하고 미래에 매우 위협적인 위험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예상된다면 사전에 이에 대한 안전한 예방 조치를 취해 두는 것이 필요함도 강조하고 있다.
윤리란 인간 행동에 대한 규범적인 제어 장치이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의 자발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행위자 스스로가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강제적인 규제라 하더라도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나노강령 역시 하나의 윤리 규범일 뿐이다. 하지만 나노강령이 그동안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치중립적인 차원에서 보아 왔던 기존의 관점과 달리, 과학기술의 사회적·윤리적 책무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존재 그 자체로서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21세기의 첨단과학기술이 인간 사회 및 자연환경에 미치는 영향력이 과거의 기술에 비해 매우 커진 만큼, 과거와 달리 첨단과학기술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나노강령과 같은 윤리강령이 점점 더 절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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