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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오디세이

노란 중앙선과 수학적 정의

수학은 약속에서 시작한다고 할 때, 그 약속은 “점은 크기가 없고 위치만 있다” 또는 “선은 폭이 없는 길이다” 등과 같은 수학적 정의이다. 크기가 없는 점과 폭이 없는 선이라니 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이처럼 낯설고 이상하기 짝이 없어 보통 사람들이 다가가기 쉽지 않아 보이는 정의가 여럿 있다.

걔중에는 말장난 같아 보이는 것도 있는데, “유한이 아니면 무한”이라는 정의가 그것이다. 무한의 세계를 상상하며 어느 정도 신비스러움을 기대했다면 정말 싱겁기 짝이 없어 실망감을 지나 무엇인가에 사기당한 느낌마저 들 수도 있다. 그럼 도대체 유한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이어가겠지만, 그렇다고 ‘무한이 아닌 것은 유한’이라는 식의 정의는 물론 아니다. 유한에 대한 정의는 좀 복잡하니, 아쉽겠지만 관심이 있다면 다른 곳에서 찾아보도록 양해를 구하자.

수학을 배우고 가르친다는 것은 이 정의들을 머릿속에 고이 간직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수학의 교수·학습 내용은, 점과 선은 왜 그렇게 우리의 감각과는 무관하게 정의했는지 그리고 무한을 정의하면서 왜 유한을 짚고 넘어갔는지 바로 그 이유를 밝히고 이해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물론 여기서 이를 시도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정의를 만들고 지켜 나가는 것이 수학자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점만 언급하고 넘어가자.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고 난해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이들 수학적 정의는 어느 한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하나의 정의는 그들 사이의 합의와 동의를 거쳐야만 확정되며, 해당 분야의 학문세계는 바로 이 정의를 토대로 구축된다. 앞에서 보았던 점과 직선에 대한 정의는 유클리드 기하학이라는 거대한 빌딩을 지탱하는 주춧돌 중에 들어 있고, 무한에 대한 정의는 집합론이라는 깜찍하고 아담한 성당의 주춧돌 중에 포함되어 있다.

우리의 하루하루 삶이 이루어지는 사회도 다르지 않다. 각자의 이해와 갈등이 뒤섞여 표출되지만 그럼에도 사회라는 거대한 건축물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이를 지탱하는 서로 간의 합의와 동의라는 주춧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주춧돌 중 하나로 도로에 그려진 노란 중앙선을 예로 들 수 있다. 반대편 차선에 많은 차들이 달려오고 있음에도 어떤 걱정도 없이 아니 의식조차 하지 않으며 운전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노란 중앙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노란 중앙선이 아니라, 노란 중앙선에 대한 약속과 믿음이다. 중앙선을 침범하며 운전하지 않는다는 암묵적 약속과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약속은 지켜질 것이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점과 직선에 대한 정의가 그렇듯, 이 약속과 믿음은 도로를 달리는 모든 차에 적용된다. 값비싼 외제차나 덩치 큰 덤프트럭이라고 하여 중앙선 침범이 허용된다면, 우리는 매번 운전을 할 때마다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도로에 나서야만 할 것이다.

재벌 2.3세 일탈 사례 (출처 : 경향DB)


지난해 우리가 느꼈던 분노와 좌절은 노란 중앙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상실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막대한 부를 소유하였다며, 또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에 있다며, 심지어 박학다식의 재기를 인정받았다며 노란 중앙선을 마구마구 넘나들며 타인의 존재를 아랑곳하지 않는 오만이 우리를 극심한 절망에 빠뜨렸다.

새해, 의례적인 덕담이 오고가지만 노란 중앙선에 대한 약속과 믿음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공허한 낙관과 막연한 비관만이 공존할 것이다. 한 번 무너진 약속과 믿음의 회복에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만 하겠지만, 그렇다고 이를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은가. 두 눈을 크게 뜨고 흐릿해진 중앙선의 자취를 찾아 두 손을 모아 정성들여 새로이 색칠해야 하는 것이 새해 우리의 할 일이다. 수학자들이야 기존의 정의가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다면 언제든 새로운 정의를 만들어 이를 주춧돌로 삼아 새로운 건물을 구축할 수 있지만, 우리의 삶은 올해도 그 도로에서 계속 이어져야 하니까.

박영훈 | 수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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