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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오디세이

브렉시트가 폴란드 빵집 때문?

과학이 보여주는 세상의 모습은 종종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비상식적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기묘하더라도 과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라면 유용할 때가 많다. 최근 인간의 판단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 주도하며 우리는 일단 자신의 감정에 이끌려 선택을 하고 나면 온갖 종류의 자기합리화를 통해 이 선택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만 이성을 활용한다는 주장이 주목을 받고 있다. 손쉽게 도덕적 허무주의로 이어질 수 있는 이 주장은 국내에서도 한때 정치인들이 대중의 마음을 끌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호소해야 한다는 생각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영국 런던 외곽의 레이톤에 있는 폴란드 상점가 앞으로 20일(현지시간) 주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다가오면서 이곳의 폴란드 이주민 공동체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정동식 통신원

 

지난주 브렉시트 상황은 이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영국민들에게 유럽연합에 잔류할 것인지를 묻는 국민투표 직전까지 가장 주목받았던 쟁점은 단연코 급증하는 이민자였다. 탈퇴파 정치인들은 동유럽계 이민자들이 유럽연합의 자유이동 원칙에 근거하여 영국으로 이주한 후 사회복지 혜택을 누리면서 수많은 사회문제를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영국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낮은 임금을 마다하지 않고 일하는 이들 이민자 때문에 자신들의 노동조건이 악화되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그 결과 잔류를 택한 노동당의 공식 입장에도 불구하고 많은 노동당 지지자들은 이번 국민투표에서 탈퇴를 선택했다.

 

이런 반이민자 정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폴란드 빵집이다. 런던처럼 이민자 문화에 익숙한 대도시가 아닌 중소도시에 사는 영국민들에게 폴란드 사람이 경영하는 빵집은 매우 낯선 현상이다. 그런데 이런 빵집이 영국 전역에 걸쳐 작은 도시의 중심가에 자리를 잡고 전통적인 영국 빵집을 밀어내는 데 대해 영국민들, 특히 중장년층이 일종의 국가정체성의 위기감을 느낀 것 같다. 존 메이저부터 시작하여 보수당, 노동당을 가리지 않고 모든 역대 총리들이 잔류를 지지하는 성명을 내고 영국은행 수장까지 나서서 탈퇴 시 상당한 경제적 대가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탈퇴 시 위험만 강조하는 정치인들은 불만족스러운 현 상태를 지키기 급급한 부정적인물로 보인 반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겠다는 정치인들은 영국의 자주성을 드높일 진취적인물로 보였다. 결국 매일 시내에서 마주치는 폴란드 빵집과 공원이나 병원에서 낯선 언어로 이야기하는 외국인 가족에 대한 직관적반발이 영국이 유럽연합으로부터 얻고 있는 추상적혜택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결국 브렉시트 결과는 정치적 판단에서 감정이 이성을 압도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선거 결과의 통계를 잘 살펴보면 이런 생각의 허술함이 금방 드러난다. 브렉시트에 찬성한 52%가량의 유권자들은 절대적으로 잉글랜드, 웨일스의 농어촌 지역에서 나왔다. 이들은 수산자원 보존을 위한 어획할당량처럼 유럽연합의 행정조치에 의해 실질적 피해를 입었거나 적어도 피해를 입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에 비해 유럽연합 잔류를 선택한 사람 대다수는 잉글랜드 대도시와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처럼 유럽에 남는 것이 실질적으로 이득이 되거나 적어도 이득이 된다고 판단한 사람들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입장을 정했던 것이다. 또한 유럽연합 이전의 영국을 이상화하고 자신들이 뽑지 않은 브뤼셀의 관리들에 의해 자신의 삶이 간섭받는 것을 싫어하는 노년층 절대다수가 탈퇴에 표를 던졌는데, 어차피 연금을 받아 생활하는 그들에겐 유럽연합 탈퇴가 가져올 부정적 효과는 크지 않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통합된 유럽에서 자신의 미래를 설계했던 젊은 세대 절대다수는 잔류를 택했는데 다문화적 환경에 익숙한 그들에게 유럽연합은 기회와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영국민들은 자신의 직접적 이해관계, 삶의 장기적 목표,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 등에 대한 나름의 숙고에 입각하여 브렉시트 여부를 선택했다. 당연히 개인마다 구체적 결정 과정에는 이성적 논의만이 아니라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도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성과 감정이 정확히 어떻게 상호작용해서 브렉시트처럼 사회적으로 중요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부 도덕심리학자가 제안하는 단순한 설명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고 풍부한 분석이 요구된다. 브렉시트는 폴란드 빵집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모든 중요한 사회현상에 대한 과학적 분석은 이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상욱 한양대 철학과 교수·과학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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