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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오디세이

슈퍼컴퓨터 전쟁

한 국가의 과학 수준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지표에는 노벨상이 있다. 노벨상 외 또 다른 과학 지표로는 슈퍼컴퓨터 수준을 들 수 있다. 슈퍼컴퓨터는 개인용 PC나 기업에서 쓰는 중대형 컴퓨터와는 데이터 규모면이나 그 속도 면에서 질적인 차이를 가진 계산 장치이다. 특히 기상예측, 항공기 설계, 충돌 평가와 같이 엄청난 비용과 위험이 따르는 경우에 슈퍼컴을 이용한 모의실험은 필수적이다. 제대로 된 슈퍼컴이 없으면 자동차 생산부터 신약개발에 이르기까지 속도와 규모면에서 슈퍼컴을 가진 기업이나 국가를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1등만이 모든 것을 가지고, 2등에게는 국물마저 허용되지 않는 가혹한 자본주의적 경쟁에서 슈퍼컴은 가장 기본적인 무기가 될 수밖에 없다.

 

전 세계에는 수천대의 슈퍼컴이 있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상위 500등까지의 슈퍼컴이다. 특정 슈퍼컴의 순위가 하루아침에 바뀌기도 하고, 몇 달 사이에 100등급 이상 떨어지기도 하는 것이 슈퍼컴 전쟁의 현장이다. 슈퍼컴 전쟁에서 최근 주목할 만한 사건은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한 점이다. 중국 국방기술대학에서 개발한 이 컴퓨터의 이름은 톈허(Tianhe, 天河)-2이다. 우리말로 하자면 은하수-2호. 최고 속도는 33.86페타플롭스라고 한다. 1페타플롭스는 1초에 1000조번의 단위 계산을 하는 속도를 말하는 것이므로 톈허-2의 무시무시한 속도는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그전까지 1등을 지킨 미국 오크리지 국립연구소의 타이탄은 2위로 밀려나게 되었다. 타이탄의 속도가 약 17.5페타플롭스이니까, 1등과는 꽤 격차가 나는 셈이다.

 

 

중국 슈퍼컴퓨터 ‘톈허(天河) 1호 (경향DB)


톈허-2는 1만6000개의 CPU칩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칩에 들어 있는 코어의 수까지 고려한다면 무려 300만개의 코어가 사용되고 있다. 고성능 PC의 코어가 2개 혹은 4개 정도니까, 대략 PC 100만대가 묶인 덩치를 상상하면 될 것이다. 부산 사직야구장의 모든 자리에 PC를 한 대씩 놓으면 약 3만대가 되니까, 다닥다닥 붙여진 야구장 33개의 모든 좌석에 PC가 놓여진 SF적 장면을 상상해보자. 타이탄 이전에는 일본 후지쓰 슈퍼컴이 1위였는데, 미국과 일본 간의 1위 쟁탈전에 중국이 드디어 다크호스로 등장한 셈이다.

 

중국에 1위를 빼앗긴 상황을 애써 외면하려는 미국 정서도 느껴진다. 톈허-2에 사용된 중앙처리장치는 모두 인텔(intel)사의 제온(Xeon) 제품을 사용했기 때문에 사실상 미국의 승리나 다름없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지만 그 외 모든 소프트웨어와 네트워크 설계는 중국 기술로만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것은 간과될 수 없는 현실이다. 1위는 중국이지만 500위권 중에서 252대가 미국 소유라는 사실은 미국이 가진 과학경쟁력의 강력한 토대를 웅변해주기에 충분하다. 500위권 슈퍼컴 중에 유럽은 112대, 중국은 66대, 일본은 30대를 가지고 있다. 프랑스, 독일, 영국은 각각 20여대를 보유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4대이다. 7대의 러시아는 분자생물학, 나노과학 등 슈퍼컴이 활용되는 다양한 융합분야에서의 어려움이 예상된다.

 

500위권 슈퍼컴들 중에 휴렛패커드(HP)와 아이비엠(IBM) 제품이 350대를 차지하고 있다. 이 두 업체의 압도적인 우위는 지속될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연구실에서 만든 ‘천둥’ 슈퍼컴이 400위권에 있는 것은 주목받을 만한 일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200위권이었던 천둥 슈퍼컴이 잠깐 사이에 400위권으로 떨어진 것을 보면 슈퍼컴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가 잘 느껴진다.


슈퍼컴이 빠르기만 하면 장땡인가. 그건 아니다. 슈퍼컴 평가 속도는 공중에 매달린 자동차의 헛바퀴 속도와 같다고 한다. 다양한 커브와 비포장 도로 등을 달릴 때의 실질 현장 속도와 헛바퀴 속도와는 큰 차이가 있다. 좀 느린 슈퍼컴이라도 특정한 문제를 잘 풀도록 소프트웨어를 구성하면 1등 슈퍼컴보다 더 나은 기계가 될 수 있다.

핵심은 슈퍼컴의 개별 장치를 최대한 활용하도록 해주는 소프트웨어의 설계에 있다. 100개의 사과를 깎는 일에 한 사람이 4시간 걸린다면, 두 사람을 투입할 경우 2시간 만에 끝난다. 그러나 한 사람이 10개월 걸려 임신하고 출산하는 일을, 두 사람에게 맡긴다고 해서 5개월 만에 끝낼 수는 없다. 이처럼 문제 자체를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슈퍼컴으로 속도를 낼 수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하면 최대의 성능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파악해야만 슈퍼컴의 그 무시무시한 속도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슈퍼컴으로 테트리스나 스타크래프트를 한다고 해서 그 실력이 속도만큼 올라갈 리는 만무하다. 슈퍼컴뿐만 아니라 모든 IT산업에서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창의력이기 때문이다.

 

조환규 | 부산대 교수·컴퓨터공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