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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오디세이

윈스턴 처칠의 ‘과학 게슈타포’

 1945년 여름 영국은 2차 세계대전 후 처음 치러지는 총선의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전쟁 중 전시 연립내각의 수장으로 영국민을 단결시켰던 윈스턴 처칠의 보수당과 전시 내각에서 차근차근 국정 수행 경험을 쌓았던 클레멘트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의 대결이었다. 당시 처칠의 개인적 인기는 최정점에 있었기에 누구나 보수당의 손쉬운 압승을 예측했다. 이 와중에 처칠은 선거 유세의 일환으로 6월4일, 악명 높은 ‘게슈타포’ 연설을 한다.

당시 영국민들은 보편적 복지와 국민 의료보험의 필요성을 주장한, 1942년 베버리지 보고서에 높은 호응을 보이는 등 전반적으로 전후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다. 처칠과 보수당은 베버리지 보고서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이런 상황에 불안해했다. 게다가 처칠은 전쟁 중 동맹국이었던 소련과 전후 자주 충돌하곤 했기에 국내에서 좌파의 성장을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연설에서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하면 공공의 이익을 명분으로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종의 게슈타포’에 의한 감시 사회가 등장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쟁 기간 중 영국민의 삶을 끔찍하게 만들었던 적국 독일에 대한 증오심이 생생한 상황에서 선거 경쟁자를 혐오스러운 독일의 비밀경찰에 빗댄 것이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표를 얻기 위해 손쉬운 ‘종북몰이’를 한 셈이다.

처칠의 기대와 달리 이 연설은 역효과를 가져왔다. 영국민들은 전쟁 중 초당적 지도자로 존경받던 처칠이 전쟁이 끝나자 특정 정당의 이익을 위해 상대 당을 폄하하기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자 실망했다. 애틀리는 처칠의 독설에 차분하게 대응하면서 그의 연설이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성공적이었던 처칠이 평화 시기의 영국 총리로는 적합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고 지적했다.



영국 윈스턴 처칠 당시 총리가 1946년 3월5일 미국 미주리주 풀턴의 웨스트민스터 칼리지를 방문해 ‘철의 장막’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해 연설하고 있다._경향DB


1945년은 소련 과학원이 창립 22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했다. 기념식을 갖기에는 약간 어정쩡했지만,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난 것을 축하하고 전쟁 기간 중 외부 과학자와 접촉할 기회가 없었던 자국 과학자의 국제교류도 증진할 겸 소련은 그해 6월 연합국 과학자를 초청하여 성대한 국제행사를 개최했다.

이를 위해 영국 왕립학회는 과학의 전 분야를 망라한 과학자로 대표단을 꾸렸는데, 이 대표단에 속한 몇몇 과학자의 출국비자 발급에 영국 정보국이 반대하고 나섰다. 블라켓이나 디락처럼 영국 핵폭탄 개발 과정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이 당시 영국과 점점 소원해지고 있던 소련을 방문하는 것은 국가안보상 위험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특히 정보국은 버날을 비롯한 이들 과학자 상당수가 사회주의에 호의적이기에 기밀정보를 자발적으로 소련에 제공할 수도 있다고 의심했다.


이에 처칠은 이들을 출국금지했다. 결국 블라켓, 디락, 버날 등의 과학자들은 출국 몇 시간 전에 이 결정을 통보받고 곧바로 귀가해야 했다. 소련 측에 전달된 공식 이유는 이들이 당시도 계속되고 있던 일본과의 전쟁을 위한 중요 연구를 하고 있기에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었고 이 점을 잘 알고 있을 수밖에 없는 당사자들은 정부의 과학 활동 간섭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아이러니한 점은 영국 정보국과 처칠의 염려는 불필요했다는 사실이다. 소련은 이미 미국의 핵개발 관련 정보를 미국 맨해튼 프로젝트 내에 침투한 스파이로부터 얻고 있었기에 구태여 학문 교류를 위해 방문한 과학자들에게까지 정보를 구걸할 필요가 없었다.이 사건을 연구한 맨체스터대학의 과학사학자 휴즈에 따르면, 처칠이 학술행사에까지 이렇게 무리한 간섭을 했던 이유는 영국에 비해 소련이 전쟁정보 공유에 소극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처칠의 이 판단이 옳았는지 자체가 역사적으로 논란거리지만, 처칠은 의회 답변에서 몇몇 과학자들이 왜 출국비자를 거부당했는지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뻔뻔하게 거짓말까지 했다. 진짜 아이러니는 여기에 있다. 처칠이 노동당을 공격하며 사용했던, 자유로운 의사 표현과 생각의 공유를 억압하는 ‘게슈타포’의 역할을 과학 연구에 대해 처칠 스스로가 자임했던 것이다.

1945년 7월26일 영국 총선은 영국 정치사에서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은, 노동당의 압도적 승리로 귀결되었다. 영국 국민은 ‘게슈타포’ 운운하는 전쟁영웅 처칠보다는 새로운 영국 사회의 비전을 제시한 애틀리를 선택했다. 한편 영국 왕립학회가 같은 해 정부의 개입에서 학회 소속 과학자를 지켜내지 못한 일은 아직까지도 부끄러운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이상욱 | 한양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