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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오디세이

[과학오디세이]이념이 과학을 굴복시키려 할 때

독일의 한 연구소에 방문연구원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옛 소련의 조그만 위성국 출신 수학자와 같은 방을 사용하게 됐다. 동갑인 우리 둘은 관심사도 비슷해서 쉽게 친해졌다. 이런저런 이야기 중 그 나라의 특이한 박사학위 심사 과정이 좀 충격적이었다. 1980년대까지 그 나라의 모든 박사 후보자는 일종의 국가관 평가시험을 거쳐야만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면접 문제란 것이 고약해 어떤 경우에는 몇 번째 당서기장은 누구이며 그의 업적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라는 식으로도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평가위원이 작심하면 누구라도 탈락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국가관이 박사학위의 평가항목이 되는 것도 웃기는 것이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은 심사위원이 결정할 일이지 국가 관료가 나설 일은 아닐 것이다.

어떤 이념이 대를 이어 유지되고 위세를 갖추기 위해서는 국가체제 내에서의 강제된 평가 시스템이 필수적이다. 봉건적 이념이 조선시대 내내 유지된 이유와 그 동력을 생각해보자. 나라에서 남존여비의 당위성을 정리한 문서를 백성들에게 반상회를 통해 나눠주고, 칠거지악을 저지르는 여성을 사복 포졸이 암행 감찰로 통제했기 때문에 남존여비가 마땅한 규범으로 유지된 것은 아닌지 싶다. 그것은 입신양명의 필수과정인 과거시험에서 봉건적 가치가 모범답안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과거시험용 교과서, 기출 문제집은 모두 유교적 이념의 당위에 관한 것이었다. 유교이념은 아이들이 다니는 서당에까지 선행학습 교재로 보급됐기 때문에 이것이 권력층의 국가 지배 이념이 될 수 있었다. 과거시험에서 누군가가 용감하게 신분제의 모순을 지적하며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단 말인가!” 이딴 식으로 답을 써냈다면 아마도 당사자는 물론 그 지도교수까지 모조리 멸문지화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시절이 수상하다. 역사적 사실의 다양한 해석과 가치 기준을 하나로 재단하는 것도 걱정이지만, 더 큰 걱정은 이 강제된 가치 기준이 각종 시험의 평가기준으로 강제되는 것이다. 모호하고 요상한 주장을 정답으로 강제함으로써 특정 이념을 정답으로 강요하는 것은 이념전쟁의 공통적인 기착점이기 때문이다. 평가는 정신과 육체 모두를 교정하는 강력한 현실적 수단임을 역사가 증명한다. 예를 들어 1, 2점으로 등급이 갈리는 지금 수능체제에서 역사전쟁이 벌어진다면 1번 정답파 학부모들과 3번 정답파 학부모 간의 민망스러운 몸싸움으로 대법원 정문 앞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 모든 가정의 행불행을 좌우할 입시전쟁에서 양보란 있을 수 없다. 영민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출제자가 원하는 답안을 적을 것이고 이런 시험을 통해 이념은 안착되고 고착될 것이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좌편향 척결 광풍이 역사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로까지 번질 조짐을 보인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를 걱정해야 할 권력자들이 도리어 이 광풍에 막말의 풀무질을 하고 있으니 할 말을 잊게 한다.

이념으로 과학을 편 가르고 과학을 무릎 꿇린 역사는 리센코의 만행으로 충분하다. 소련 식물학자인 리센코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적 가치를 입증하는 황당한 유전이론을 만들어 낸다. 그의 저돌적 행동에 환호한 소련 정치가들은 리센코를 적극 지원한다. 이에 들뜬 리센코는 동료들의 이론을 부르주아 과학이라고 낙인찍고 권력의 힘을 빌려 관련 학자들을 과학계에서 모두 추방해 버린다. 이 과정에서 비공개 처형당한 과학자도 있었다. 그러나 리센코의 날조된 이론은 결국 과학을 이길 수 없었다. 리센코의 악행으로 찬란했던 소련 생물학은 30년 퇴보하게 되고 이후 이는 소련 농업에 엄청난 재앙이 됐다. 지금도 그 생채기는 남아 있다. 아인슈타인 이론을 유대인의 쓰레기 이론이라 멸시한 히틀러는 그의 이론과 추종자를 아리안 과학에서 모두 빼내 버렸다. 이념이 과학을 잠시 누를 수는 있지만 결코 이길 수는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40억원짜리 MB표 4대강 로봇 물고기를 떠올려보면 될 것이다.

작금은 좌편향 역사뿐만 아니라 종북 과학, 반국가 공학까지도 발본색원할 무시무시한 분위기다. 역사가 보여줬듯이 이념이 설치면 과학은 망하게 된다. 역사는 역사학자에게, 과학은 과학자에게 맡겨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애족의 길이며 민족중흥의 초석인 것이다.



조환규 | 부산대 교수·컴퓨터공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