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이름은 잘 지어야 한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우스운 이름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의 사연을 들은 적이 있다. 청취자야 웃고 즐겼지만 그 사람들이 평생 받았을 상처가 안쓰러웠다. 자기 자식 이름을 장난 삼아 짓는 부모가 상당히 많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다행히 요즘은 개명하기가 쉬워졌단다. 단순히 사람 이름만 잘 지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입양아의 대모께서는 ‘버려진 아이’라는 말 대신 ‘발견된 아이’라는 말을 쓰자고 하셨다. 아이의 입장을 생각해 본다면 타당한 지적인 듯하다. ‘명품’을 ‘사치품’으로 바꾸자는 의견도 있다. 이름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성격 규정이 달라진다.
특히 새로운 물질, 새로운 생물, 새로운 현상, 새로운 제품이 쏟아져 나오는 과학기술계에서는 가끔 그 연구자나 개발자가 작명가 노릇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이때도 이름을 잘 짓는 것은 중요하다. 가끔 어려운 내용을 좀 쉽게 알려주려고 하다가 이름을 잘못 지어서 오해를 불러일으켜 고생하는 경우도 꽤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환경 호르몬’이다. 일본의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어려운 개념을 쉽게 설명하려던 교수들에 의해 확산된 단어가 바로 이 단어인데 과학계에서는 ‘내분비계 교란물질(endocrine disruptors)’이라고 한다. 그 사전적인 뜻은 “동물체의 내분비 계통의 기능을 교란하여 깨뜨리거나 성 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유해 환경 물질”이라고 되어 있다. 좀 더 부연하자면 호르몬을 비롯한 내분비물질의 합성, 분비, 수송, 결합, 활성 등을 방해하는 모든 물질을 뜻한다.
환경호르몬 관련 'SBS스페셜' (출처 : 경향DB)
그런데 환경 호르몬이라는 이름이 유명해지면서 사람들은 환경 호르몬이 꼭 산업 환경에서 검출되는 물질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고엽제 성분으로 가장 유명한 다이옥신이나 일부 PC(폴리카보네이트) 소재 플라스틱 등에서 가끔 검출되는 물질들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생물체 내에도 다양한 내분비계 교란 물질들이 존재하며 심지어 우리가 먹는 식품 중에도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콩 속의 이소플라본이다.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해서 식물성 에스트로겐(phytoestrogen)이라고도 불리는 이 물질들은 건강기능식품 원료로 인정까지 받은 물질이다. 하지만 여성 호르몬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영아들에게는 조심시키는 것이 좋다는 의견도 있다. 논란 중인 내용이지만 콩을 많이 섭취한 남성의 정자 수가 적다고 하는데 역시 이소플라본 때문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좀 더 엉뚱한 이름의 한 예는 ‘전자레인지’다. 이것도 일본식 조어인데 전자제품 할 때의 ‘전자(電子)’와 범위라는 뜻의 ‘range’의 합성어이다.
이 황당한 이름은 초창기 일본의 전차에 달려있던 조리 기구를 일본 국철 직원이 대충 이름 붙인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출처: 경향DB
전자레인지를 영어로는 마이크로웨이브 오븐(microwave oven)이라고 하는데 이는 “마이크로파로 가열하는 장치”라는 뜻이다. 마이크로파는 가시광선, 적외선, 원적외선보다 파장이 길기 때문에 특별히 몸에 해로울 이유는 없다. 대체로 파장은 짧을수록 몸에 해롭다.
마이크로파 가열법은 특정 주파수의 전자파를 쬐어 식품 속의 물 분자를 진동시켜서 가열하는 방법인데 엉뚱하게 이름이 ‘전자’레인지이다 보니 ‘전자’파가 많이 나오는 것으로 오인되어 여러 가지 헛소문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전자파의 전자(電磁)와 전자레인지의 전자(電子)는 전혀 다른 한자어이다. 전자레인지라는 이름은 전 세계에서 일본과 한국, 그리고 의외로 북한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만 특히 이런 오해 사기 쉬운 이름을 붙이는 것은 아니다. 서양에도 그런 사례는 있다. 대표적인 것인 ‘슈퍼박테리아’이다. 지구를 거꾸로 돌릴 수 있는 괴력의 슈퍼맨을 연상시키는 이 세균은 두 가지 이상의 항생제에 죽지 않는 ‘다제내성(multiple drug resistance) 세균’을 의미한다.
몇 년 전 일본의 병원에서 슈퍼박테리아 집단 감염 사태가 발생하자 일본 여행을 가도 되느냐는 문의가 많았던 적이 있는데 사실 슈퍼박테리아는 슈퍼맨보다 훨씬 힘이 약하다. 그리고 일상 환경보다는 주로 병원이나 집단 시설의 2차 감염이 문제다. 때문에 당시 정부에서는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 슈퍼박테리아로 부르지 말고 다제내성균으로 불러달라고 언론에 당부하기까지 했다.
이 외에도 독감, 활성 산소 등 찾아보면 이런 예는 많다. 아무튼 이름을 잘 짓는 것은 중요하지만 언제나 어려운 것은 ‘잘’이라는 단어다. 이해하기 쉬우면서 오해의 소지가 없는 이름을 붙이기 어렵다면 그런 이름들을 볼 때 마다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과학에서는 정확한 개념 정의가 첫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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