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원 | 서울시립대 교수·철학
오늘날 인간의 실존 문제는 기술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기술을 통하지 않고 인간이 세계와 만나 소통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랜 기간 진화과정에서 자연에 적응해 왔듯이 이미 기술에도 적응이 되어 이를 조금이라도 벗어나서는 아마도 ‘인간답게’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인간의 삶의 방식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삶의 의미조차 어느덧 기술에 종속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한 독일 기자가 인터넷과 스마트폰 없이 아날로그로 40일간 살아보기를 시도한 후 이에 관한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다. 이와 유사한 시도가 최근 모 방송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진행된 바 있다. 모두 시작은 ‘만약 일정한 기간 동안 자의로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끊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문제의식이었다.
기자의 경우 은행에 직접 찾아가 계좌 이체하면서 여러 번 실수를 하고, 지도를 직접 보면서 여행계획을 일일이 짜는 것에 짜증을 내며, 원하는 정보를 찾기 위해 책과 사전을 뒤졌지만 결국 실패하는 등 생활이 매우 불편해졌다고 한다.
더 힘들었던 것은 바지 주머니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유령 진동을 경험하고, 갑자기 생겨난 여유에 무엇을 할지 몰라 막막해하고 불안해하며, 유선전화의 벨소리를 기다리며 외로워하는 등의 심리적인 불안이었다고 한다. 네트워크를 통한 인간관계의 일부를 차단했을 뿐인데 금단 현상이 결코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궁극에 가서 기자는 평온함을 되찾았다. SNS에서 문자로 소통하던 친구를 현실세계에서 직접 만나 수다 떠는 즐거움, 책을 읽고 음미하며 스스로 사색하는 여유로움, 몰라도 될 수많은 정보들로부터의 해방, 페이스북에 연결되지 않으면 친구가 사라질 것 같고 잠시라도 정보를 따라잡지 못하면 뒤처질 것 같은 정보 콤플렉스로부터의 해방, 타인의 시선이 아닌 진정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상 바라보기 등 그동안 잊고 살았던 과거의 인간다운 생활상을 다시 되찾은 것이다.
오늘의 기술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를 미국의 기술 철학자 돈 아이디는 기술에 의한 인간의 지각 변형이 만들어낸 결과로 혹은 기술을 통한 세계에 대한 인간 경험의 확장과 축소라는 말로 묘사하고 있다. 내용인즉 기술로 인해 인간의 지각 경험에 변형이 일어나 이에 바탕한 세계에 대한 어떤 경험은 확장되는 반면, 반대로 그것에 상대해서 세계에 대한 또 다른 경험은 축소된다는 것이다.
가령 천체망원경으로 달을 관측하는 경우 달 표면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정보를 얻는 등 지식의 확장이 있는 반면, 동시에 달에 함축되어 있던 방아 찧는 토끼, 처량함 등과 같은 다양한 정서적 이미지들은 축소되거나 사라지게 된다.
이는 기자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디지털을 매개로 한 새로운 사회적 관계 및 생활양식이 생성되거나 확장된 반면, 동시에 아날로그적인 삶의 방식들은 축소된다. 이렇게 보면 기술은 인간에게 결코 중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기술로 인해 세계에 대한 나의 경험 곧 나와 세계의 관계가 일부 변형되고, 나의 실존적 의미도 그에 따라 일부 굴절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 기술시대에 이러한 경험은 단지 일부에 불과하다. 인간이 기술과 맺는 관계는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하다. 가령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정보통신 환경에 익숙해져 있는 N(네트워크)세대 혹은 C(연결)세대를 생각해 보자. 인터넷과 스마트폰 없이 살다가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이것들을 사용하게 된 독일 기자의 아날로그 생활로의 행복한 회귀 경험이, 과연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행복한 경험이 될 수 있을까. 아마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에게 네트워크로부터의 단절은 가장 극적인 소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KBS2 '인간의 조건'에 출연하는 개그맨 양상국, 박성호, 김준호, 김준현, 허경환, 정태호 (출처; 경향DB)
돈 아이디는 이를 기술이 인간 생활의 이면으로 숨어들어와 자연의 대기권처럼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기술권’으로 자리매김한 경우라고 말하고 있다. 기술이 인간에게 심대한 영향을 주고 있지만 이미 체화되어 인간이 이를 직접 의식하지 못하거나 의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상황을 강조하려 한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기술과 직접 관계함 없이 이것을 배경으로 살아가게 된다. 컴퓨터 제어기술로 자동으로 불빛이 조절되고 난방이 통제되며 실내 공기가 조절되는 인공지능 건물에 사는 경우가 좋은 예다. 이렇게 본다면 네트워크 기술은 기성세대와 달리 N세대 또는 C세대에게는 의식할 필요가 없는 배경 기술로 이미 체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 하더라도 이처럼 인간이 기술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기술에 대한 인간의 태도, 나아가 현대 기술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정체성이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 N세대 혹은 C세대의 경우 인터넷과 스마트폰 없이 40일 동안 지낸다면 독일 기자처럼 일시적인 금단 현상으로 그치지 않고 어쩌면 존재 이유가 위협받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나아갈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기술을 매개로 세대 간 차이가 더욱 확연히 벌어질 수 있다. 아날로그로 살아보기의 결과가 실제로 세대 간에 어떻게 나타날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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