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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오디세이

내가 보지 못하는 고릴라

이상욱 한양대 교수·철학


우리는 외부 세계를 보는 방식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커다란 영사막에 흥미진진한 장면이 영사기로부터 쏟아져 나오듯이, 우리의 눈을 통해 외부의 시각 정보가 들어와 뇌의 뒤통수쯤에 파노라마처럼 비칠 것이라는 식이다. 데카르트라는 유명한 근세 철학자가 이런 식으로 시각을 설명했기에 ‘데카르트의 극장’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시각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 망막에는 시각적 영상이 만들어질 수 없는 ‘맹점’이라는 곳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맹점에 해당하는 까만 점을 실제 보지는 않는다. 움직이는 눈동자가 여러 각도에서 수집한 시각 정보를 두뇌가 끊임없이 깔끔한 영상으로 우리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설사 눈동자를 특정 지점에 고정시켜도 두뇌는 그 근처에서 오는 시각 정보를 활용하여 제법 그럴듯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시각 정보를 모두 공평하게 대우하지도 않는다. 밀려드는 시각 정보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만 선택적으로 집중한다. 인터넷에서 관련 동영상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고릴라 실험’을 살펴보자. 이 실험에서 관객들은 여러 사람들이 농구공을 몇 번 주고받는지 정확하게 세라는 요구를 받는다. 관객들은 요구받은 대로 여기저기로 날아다니는 농구공에 집중하느라 고릴라 분장을 한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한다. 고릴라가 화면 가운데 잠시 멈춰 서서 가슴을 주먹으로 치는 ‘인상적인’ 퍼포먼스까지 펼치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실험 후 고릴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듣고 다시 영상을 보면 누구나 어김없이 고릴라를 보게 된다.


 과학기술 연구에 관한 미래 계획을 세울 때도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 이 경우 상황은 좀 더 심각하다. 처음 고릴라를 보지 못한 사람은 나중에 고릴라의 존재를 지적해도 애써 그 중요성을 무시하거나 아예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쉽다. 국가 차원에서 시행되는 미래기술 검토 과정에서도 종종 유사한 상황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기술영향평가에서는 국가적 자원이 투여되어 개발될 근미래 신기술의 발전 방향에 대한 종합적 검토를 수행한다. 평가 과정 중 기술 전문가들은 처음에는 방어적 자세를 취하기 쉽다. 신기술의 잠재적 위험에 대한 다른 분야 전문가들의 지적을 기술 개발을 방해하려는 계획적 시도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술영향평가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 전문가들 사이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상대방이 보지 못하는 ‘고릴라’를 서로 지적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보스턴 프랭클린 파크 동물원에서 엄마 고릴라가 새끼 고릴라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이고 있다. (출처; 경향DB)


작년 기술영향평가는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뇌과학 응용기술 중 BMI(뇌-기계 인터페이스) 기술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이 기술의 잠재력은 놀랍다. BMI 기술을 활용하면 뇌로부터 정보를 읽어서 몸 밖의 기계를 작동시킬 수 있다. 즉 생각으로 전등불을 켜거나 세탁기를 돌리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기술의 잠재적 효용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병에 걸렸거나 몸을 다쳐 움직이기 어려운 사람들이 생활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고, 보다 먼 미래에는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정보를 근처의 유비쿼터스 네트워크에 접속하여 뇌에 내려받고 필요한 업무를 수행하는 일도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술의 문제점은? 잘 안 떠오른다. 이렇게 좋은 기술이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을까? 이때 심리학 전공자 한 분이 이런 지적을 하셨다. 나중에 BMI 기계가 많이 사용되다 보면 뇌에 장착되어 사용되던 BMI 기계의 중고시장도 형성될 텐데 그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씀에 무릎을 쳤다. 최근 자동차 중고시장에서 침수된 적이 있는 차를 모르고 샀다가 낭패를 본 사람 이야기가 자주 보도된다. 자동차도 그런 문제를 일으키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 뇌 정보를 읽던 기계가 중고로 거래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윤리적, 법적, 사회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데 평가위원들 모두가 동의했다.


전문가라서 불리한 점이 있다. 전문가는 그 정의상 특정 분야를 매우 잘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게 특정 분야를 너무 잘 알다 보면 모든 상항을 그 분야의 시각으로만 바라보게 되고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을 보지 못하기 쉽다. 점점 복잡해져가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의 협력이 절실하다. 이런 협력이 생산적이려면 전문가들은 자신의 분야에 갇힌 상상력을 해방시켜 다른 시각으로부터의 지적이 자신이 미처 보지 못한 ‘고릴라’를 가리키고 있는지 언제나 겸허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