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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오디세이

과학과 사회의 변혁은 어떻게 오는가

이상욱 | 한양대 교수·철학


현대문학을 전공하시는 교수님의 말씀을 듣자면 소설을 직접 쓰는 사람과 그 작품을 평론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소설가는 평론가의 평가에 신경을 안 쓰기 어려운 한편 부정적 평가에는 ‘그렇게 잘 알면 네가 한번 써봐라!’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도 있을 것이다. 평론가 입장에서는 소설 창작 자체와 그 결과물에 대한 해명 작업이 갖는 서로 다른 전문성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소설가들의 태도가 답답할 것이다.


과학자와 과학철학자의 관계도 이와 유사하다. 과학자는 과학철학자가 실제 과학 연구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과학의 본성이나 과학 연구의 의미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에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기 쉽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과학철학자는 누구일까? 아마도 반증주의 철학자 칼 포퍼일 것이다. 포퍼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철학자로 오랫동안 런던정경대학에서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을 가르는 기준으로 반증주의를 역설했다. 포퍼는 진정한 과학 연구의 특징으로 지적 정직함을 꼽았다.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일단 가설을 제시하고 이를 관찰이나 실험과 대조해서 만약 어긋나면 깨끗하게 ‘패배’를 시인하면서 자신의 가설을 포기하고 대안 가설을 찾아나서는 모습이 과학정신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포퍼는 끊임없이 대안을 모색하고 경험적으로 틀린 가설은 미련없이 포기하는 이런 자세가 과학을 과학이 아닌 것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 생각했다.


 포퍼는 지적 정직함의 전형을 아인슈타인으로부터 찾는다. 젊은 시절 포퍼는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일반상대성이론을 제시하는 강연에 참석한 경험이 있다. 그곳에서 포퍼는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이론이 예측하는 별빛이 휘어지는 정도를 명확히 제시하고 동료 물리학자들에게 이를 검증해 볼 것을 제안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포퍼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예측이 경험과 일치하지 않으면 이는 곧 자신의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포퍼는 아인슈타인의 이런 정직한 모습에서 과학 연구가 추구해야 할 이상을 보았던 것이다.


포퍼는 이런 생각을 바람직한 사회변화를 설명하는 과정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포퍼가 보기에 사회를 운용하는 방식이나 제도적 장치 역시 과학 연구와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할 때 가장 바람직하다. 즉,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다양한 사회제도와 정치체제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고 이를 통해 특정 정치체제를 선택한 다음에도 경험을 통해 그것이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미련없이 새로운 제도로 이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이행이 보장된 사회를 포퍼는 ‘열린사회’라고 칭하고 그렇지 못한 ‘닫힌사회’와 대비했다.



칼 포퍼 (출처: 경향DB)



패러다임 개념으로 유명한 토머스 쿤은 과학 연구가 진행되는 방식에 대해 포퍼와는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쿤은 과학 연구가 성공적이고 축적적으로 지식을 산출하기 위해서는 근본 전제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을 잠시 보류한 채 잘 확립된 문제풀이 방법에 기초하여 세상을 최대한 잘 설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보았다. 물론 기존 패러다임으로 풀 수 없는 문제가 많아지면 과학자들은 대안적 패러다임을 찾기 마련이다. 만약 대안적 패러다임이 미해결 문제들을 인상적으로 풀어내면서 자신의 성장잠재력을 보여주면, 다수의 과학자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채택하면서 비로소 ‘과학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기존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 사이의 선택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오랜 세월 수많은 과학자들에 의해 발전되어 온 오래된 패러다임에 비해 지금 막 등장한 새로운 패러다임은 문제풀이 능력에 있어 초반에는 뒤처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단순히 현재 성적만으로 패러다임을 평가하지 않고 미래 잠재력까지 함께 보고 패러다임을 선택한다. 그래서인지 과학의 역사를 보면 기존 패러다임에 익숙한 나이든 과학자보다 젊은 세대 과학자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에 더 긍정적인 경우가 많다.


쿤은 포퍼와 달리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철저하게 과학 연구를 설명하는 데 한정했다. 하지만 중요한 사회적 결정을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는 쿤의 과학관이 사회변혁에 어떻게 확장될 수 있을지를 묻는 것도 흥미로운 질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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