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시간을 의식하는 시간이 잦아지는 시간이다. 거울에 비친 얼굴과 색 바랜 옛 사진 속 얼굴은 시간의 존재를 일깨워준다. 3차원 공간과는 달리 우리에게 시간은 1차원이다. 하나의 선 위에 과거, 현재, 미래가 차례로 놓여 있어 마치 강물이 흐르는 듯 시간을 연상한다. 손으로 물이 움켜잡히지 않듯 시간은 늘 흘러만 간다. 현재를 의식하는 찰나 그것은 이미 흔적만 남긴 채 과거가 되어버린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그 존재마저 장담하기 어렵다. 많은 철학자들이 시간의 본질에 관해 성찰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시간은 길이, 무게, 부피와 같이 측정이 가능하지만 이들과는 사뭇 다르다. 형체도 없고 냄새도 없어 우리의 감각기관으로는 전혀 파악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시간을 표현하는 역법과 이를 측정하는 도구인 시계까지 발명하였으니 놀랍지 않은가. 인간의 위대함, 하지만 이 또한 지나치면 오만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은 자기들 마음대로 하루의 시작을 정했으니, 고대 이집트인들은 동쪽에서 붉은 해가 떠오를 때를 유대인이나 이슬람 세계에서는 일몰 시점을 기점으로 하는 등 제각각이었다. 자정을 0시로 하루의 기점을 정한 것은 1925년의 국제협정에 따른 것이니 채 백 년도 되지 않는다. 하루의 시작을 임의로 정했듯이, 7일을 묶어 일주일이라는 새로운 시간의 단위를 만들어 그중 하루를 주일이라 부른다.
15년 전 이맘때인 1999년 12월은 세기말이라 하여 이 지구촌이 꽤나 시끌벅적 들썩거렸다. 심지어 <엔드 오브 데이즈>라는 소위 종말 영화까지 등장하여, 다음 새 천년의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탄에 맞서 용감한 싸움을 벌여 지구를 구한다는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영웅담까지 보아야만 했다. 만일 우주 멀리 밖에서 외계의 누군가가 당시 지구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야단법석을 보았다면 꽤나 의아하게 여겼을 법하다.
똑같은 해가 떠오르는데도 이를 새해라 부르고, 별로 잘 눈에 띄지도 않던 양이라는 동물을 갖다 붙여 양의 해라고 하는 등, 이런 인간의 행태를 외계인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에 자신이 지배당하는 인간 속성의 아이러니에서 우리는 인공지능의 미래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리 영겁의 세월을 생각하는 상상력을 발휘한다 하더라도 시간에 대한 인간의 감각은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똑딱똑딱 움직이는 시곗바늘은 시간의 흐름이 균일한 것으로 파악하려는 시도였지만, 그럼에도 ‘일각이 여삼추’라든가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에서 보듯이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계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두 살배기 아이의 일 년은 생애의 절반이지만 50세 어른의 일 년은 50분의 1에 지나지 않으니 각자에게 결코 같은 시간일 수가 없지 않은가.
이는 때로 인간이 직면한 위기 상황에서 파국을 막을 수 있는 선견지명을 왜 가질 수 없는가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물리학자 바틀릿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박테리아 나라의 어떤 집단이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 이동하다가 땅속에 묻혀 있던 콜라 병을 발견하였다고 하자. 이곳에 정착한 이 대담무쌍한 박테리아 탐험가들은 처음에는 단 두 마리였지만 1분마다 분열하여 두 배씩 늘어난다고 가정하자. 11시 정각에 이주하여 분열을 계속 거듭하면 언젠가는 병 하나를 꽉 채우게 되어 더 이상 분열을 못해 모두 멸망에 이르는 사태가 올 것이다. 이때를 12시 정오라 하자.
이쯤에서 바틀릿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박테리아들 중에서 가장 선견지명 있다는 놈이 언제쯤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할까? 11시58분까지는 그 누구도 걱정하지 않을 것 같다. 고작 병의 4분의 1만 채워져 있으니까. 아직 두 번을 더 분열할 수 있는데, 59분에도 여유 공간은 반이나 있다. 이때쯤 박테리아 정치인들이 늘어놓는 상투적인 선전을 들을 수 있다.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우리에겐 아직도 지금의 공간보다 충분히 많은 여분의 공간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전에 자신들의 자녀는 새로운 미제 콜라 병으로 떠밀 듯 몰래 이주시켜 놓았을지도 모른다. 시간을 개념화할 수 있는 인간의 명석한 두뇌도 기하급수적인 위기 상황을 대처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바틀릿의 일화는 지금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 시급함을 알려주지 않는가. 과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박영훈 | 수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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