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우리 언론매체 거의 대부분이 ‘한국어, 수학 배우는 데 유리하다’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월스트리트저널 9일자에 실린 ‘수학에 적합한 언어’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췌, 번역한 것이다. 외국 유수 언론지에 게재된 이 글을 읽으며 조금은 우쭐해져 잠시나마 행복에 젖은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는 사실이 아니다.
‘10(열)시 10(십)분’을 ‘열시 열분’ 또는 ‘십시 십분’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10이라는 똑같은 숫자지만, 시간과 분을 나타낼 때 각각 순우리말 ‘하나, 둘, 셋…’과 한자어 ‘일, 이, 삼…’을 엄격하게 구분해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한국어의 수 세기는 순우리말과 한자어라는 이중구조다.
하지만 어른들은 우리 아이들이 수를 처음 배우면서 그 이중구조로 인해 얼마나 어려움을 겪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예를 들면, 5(다섯)사람, 5(오)인분, 5(다섯)권, 5(오)층을 각각 오사람, 다섯인분, 오권, 다섯층이라고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것, 즉 주어진 상황에 따라 한자어와 우리말 수 단어를 선택적으로 사용하지만 여기에는 정해진 규칙이 없어 그때그때 눈치껏 적절한 표현법을 익혀야만 하는 것이 처음 수 세기를 배우는 아이들에게는 무척이나 어렵다는 것이다.
고등과학원 황준묵 교수가 세계수학자대회에서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여기서 잠시 우리 아이들이 이를 어떻게 습득하는지 살펴보자. 남의 나라 이론의 수입과 소개가 넘쳐나는 교육학 분야에서 그래도 이에 관한 연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은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전남대 유아교육과 홍혜경의 연구에 따르면, 만 2세 정도면 평균적으로 우리말 수 세기는 ‘넷’까지 그리고 한자어 수 세기는 ‘일’을 알고 있다고 한다. 만 3세에 이르면 그 범위가 각각 ‘일곱’과 ‘구’로 확장되고, 이후 만 4세에는 ‘열’과 ‘십사’, 그리고 5세에는 ‘스물’과 ‘사십구’까지 말할 수 있다. 초기에는 우리말 단어를 더 많이 알고 있지만, 4~5세 이후에는 한자어 수 단어를 훨씬 더 많이 그리고 더 빠르게 습득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생활에서 우리말을 먼저 쉽게 접하기 때문이다. ‘눈 두 개, 코 하나’ 또는 ‘다섯까지 셀 동안 일어나라’ 등이 그 예이다. 일, 이, 삼과 같은 한자어는 문어체에 많이 등장하므로 나중에 익숙해진다. 그런데 왜 4~5세 이후에 갑자기 한자어 수 단어를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일까.
한자어 수 세기 단어는 일부터 십까지만 익히면 다른 나머지 수들을 규칙에 따라 쉽게 자동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십칠(47)에서 사십은 네 개의 십이고 칠은 일이 일곱 개이듯이, 십과 일의 각 자리 개수만 알면 규칙이 매우 단순해 쉽게 읽을 수 있다. 영어의 seventeen(17), forty seven(47), seventy four(74)에 나타나는 복잡한 불규칙과 비교해보라.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사는 이를 근거로 미국 노스이스턴대 카렌 푸슨과 텍사스 A&M대 예핑 리의 연구 결과를 인용했다. 하지만 연구진이 우리말을 알고 있다는 증거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들이 순우리말의 존재를 알았을 리는 없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 아이들이 ‘열, 스물, 서른 … 아흔’과 같이 전혀 규칙성이 없는 수 단어도 동시에 함께 익히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지, 서른과 마흔이나 예순과 일흔이라는 단어를 혼동해 얼마나 고생하는지, 더구나 수 단어의 이중구조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탓에 5(오)인분을 다섯인분이라고 하는 실수를 얼마나 많이 저지르는지 등에 관해 전혀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단지 한국이 한자권에 속한다는 점만을 근거로 위의 주장을 전개하고, 언론은 아무런 검토도 없이 이를 그대로 전한 것이다.
한자어 수 단어에 들어 있는 규칙성이 수 감각의 습득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처음 수를 배우면서 우리말과 한자어의 이중구조를 함께 습득해야 하는 어려움의 크기를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태어나 처음 수 세기를 시작하는 아이가 다른 나라 아이들에 비해 결코 유리하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박영훈 | 수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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