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불같은 강속구의 투수라도 변화가 없으면 버틸 수가 없다. 최고의 강철어깨 하드웨어도 좋은 볼 배합 소프트웨어와 결합할 때만 비로소 제값을 하게 된다.
미래는 소프트웨어(SW) 중심 세상이 될 것이라고 식자들은 입을 모은다. 요즘 자동차를 100년 전 자동차와 비교해 보면 바퀴, 운전자 핸들, 문짝과 같은 기본 하드웨어는 놀랍도록 그대로 유지된 반면, 소프트웨어적 구성은 엄청나게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첨단 자동차의 경쟁력은 이젠 소프트웨어에 있다. 연료 절감을 위한 지능적 제어장치라든지 각종 안전장치의 핵심은 정교한 소프트웨어와 그들 간 네트워크에 숨어 있다. 이런 시대적 변화에 따라 우리도 초·중등 과정부터 SW 교육을 정규과목으로 편성한다고 한다. 그런데 정보과학이라는 멀쩡한 이름을 두고 SW 교육이라고 새롭게 착색하는 과정을 볼 때 그 실현방안에 여러 걱정이 앞선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떤 목표로 가르쳐야 하는가이다.
SW 교육의 목적을 프로그래머 예비군 양성에 두고 있다면 실현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앞뒤 혼란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프로그래밍이나 컴퓨터 활용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래 변화의 패러다임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나가는 능력을 배양시켜 주는 것이다.
단순 프로그래밍 기술보다, 효율적 계산이 가지는 의미와 재미, 호기심을 채워줄 수 있는 다양한 놀이형 문제가 먼저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과학의 특징 중 하나는 ‘계산’을 접두어로 둔 새로운 학문이 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계산물리학, 계산생물학, 계산수학이 태동한 지는 30년도 넘는다. 뿐만 아니라 계산화학, 계산기하학, 계산언어학, 계산사진학, 심지어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법학에서조차 계산법학이라는 학문이 새로 주목받고 있다.
계산사진학의 예를 들어 보자. 이전 필름 카메라 시절에 칼 차이스 렌즈는 최고 선망의 렌즈였다. 뛰어난 발색과 선예도는 다른 렌즈들이 감히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지만 디지털 카메라 시대에 그 위력은 많이 약해졌다. 렌즈로 조정할 수 있는 일보다 훨씬 많은 일을 내장 소프트웨어가 해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잡티를 제거하고 역광과 노출을 보정하고 심지어 광학렌즈라면 피할 수 없는 색수차까지 보정해주는 프로그램 덕택이다. 실험물리학도 비슷한 상황이다. 대형 입자가속기를 돌리고 나면 수백테라의 엄청난 데이터가 생성된다. 실험에 참가한 물리학자들은 이 데이터를 적당량 분양받아 그 안에서 의미있는 사실을 캐내게 된다.
이 작업을 ‘찾아내기’가 아니라 ‘캐내기’라고 말하는 것은 어디에 뭐가 있을지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이 일은 수작업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그래서 현대 과학실험은 데이터, 소프트웨어, 통찰력, 이 3가지 필수요소로 귀착되고, 이 중 하나라도 빠지면 분석은 실패로 끝난다.
서적 '소프트웨어가 명령한다' (출처 : 경향DB)
인문학에서도 계산법학, 계산언어학, 계산정치학, 계산심리학과 같이 새로운 학문이 분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아무리 노련한 판사라도 20여명 증인의 제각각 주장 중에서 상응하지 않는 최대 부분집합을 오롯이 들어내기는 힘들 것이다.
여기에 계산법학을 활용하면 심문의 효율을 개선할 수 있다. 법조항이 세분화되고 복잡해질수록 그것을 바탕으로 사실을 규명하는 일은 결국 거대한 계산문제 풀이로 회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계산법학자들의 희망대로라면 법 제정 이전에 다른 법과의 충돌 여부도 계산으로 미리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미래 주인공인 아이들이 계산과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진입할 수 있게 안내해줄 의무가 있다. 아무리 소프트웨어를 잘 다루어도 문제에 숨어 있는 계산 문제를 찾아낼 능력이 없으면 값싼 하급 기능인이 될 뿐이다.
초·중등에서의 SW 교육 문제를 교과영역 간의 땅따먹기 문제 쯤으로 인식해 어중간하게 조정하거나 봉합해서는 곤란하다.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가 가진 유일한 경쟁력은 소프트웨어적 자산이기 때문에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계산과학, 정보과학은 입시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평가요소에 넣어서라도 장려해야 한다.
비디오를 활용한 합의 판정제 이후 프로야구판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계산’은 ‘느낌’보다 훨씬 정확하기 때문이다. 스포츠 경기에서 비디오 판독만을 전문적으로 다룰 ‘계산심판학’의 등장도 머지않았다.
조환규 | 부산대 교수·컴퓨터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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