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욱 | 한양대 교수·철학
장난감 기차와 진짜 기차는 그 모습 어디에서 차이가 날까? 일단 크기에서 시작해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중요한 차이는 바퀴가 열차 몸통의 어디에 달려있는지에 있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기차의 바퀴는 자동차 바퀴처럼 몸통의 좌우 끝 부분에 나란히 달려있다. 그에 비해 ‘진짜’ 기차의 바퀴는 몸통의 안쪽으로 밀려들어가 있다. 진짜 기차 바퀴가 안쪽으로 달려있는 이유는 바퀴가 맞물려 달리게 되어 있는 선로가 열차의 몸통 너비보다 더 좁게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장 효율적으로 기차 바퀴를 다는 방식일까?
물론 아니다. 지금은 진동을 막는 여러 기술적 장치를 장착하고 있어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기차가 움직이지만 당연히 바퀴가 몸통 좌우 끝 부분에 달려 있는 것이 차체의 안정감을 위해 더 좋다. 안쪽으로 밀려들어간 바퀴가 바람직하다면 자동차 바퀴도 안쪽 위치에 달아두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은 것을 보면 분명 기차 바퀴의 현 위치는 최적의 기술 설계의 결과라기보다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선로가 일단 좁게 깔리고 그 선로의 폭에 바퀴를 맞추다 보니 생긴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선로의 폭은 정말로 ‘좁은’ 것일까? 거기에도 무슨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실제로 기차선로가 현재 폭으로 깔린 근원적 이유는 다소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과거에 최적의 기술적 해결책이었기 때문이다. 정해진 선로를 따라 무거운 물건을 운반하면 상대적으로 더 효율적이라는 점은 고대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선로를 통한 물자의 수송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코린트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당시에는 노예 노동을 이용했던 선로를 통한 운송은 17세기가 되면 유럽 전역, 특히 영국에서 탄광에서 채굴한 석탄을 수상 운송을 위해 근처의 강가까지 운반하기 위해 활용되었다. 당시의 ‘화물차’는 말이 끌었다. 하지만 말이 끌 수 있는 화물의 무게는 지금에 비해 보잘 것 없었고, 그래서 자연히 아담한 크기의 화물차가 달리는 ‘좁은’ 선로가 깔리게 되었다.
전남 곡성 섬진강변 기차마을을 지나는 기차의 모습 l 출처:경향DB
증기기관차가 등장하면서 탄광에서는 말 대신 증기기관차를 사용하여 더 많은 석탄을 운송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 기술이 등장한 ‘환경’에는 이미 상당한 길이의 ‘좁은’ 선로가 영국 전역에 깔려 있었다는 사실이다. 간단하게 생각하자면 당연히 새로운 능력을 갖춘 증기기관차에 걸맞은 더 넓은 선로를 새로 깔아야 더 효율적일 것 같다. 하지만 새롭게 선로를 까는 일은 비용이 든다. 게다가 기존 선로에서 축적된 기술적 노하우를 활용할 여지도 없어진다. 결국 영국 기술자들은 고민 끝에 기존 선로의 폭을 유지하고 대신 증기기관차의 성능이 높아질 때마다 다른 기술적 해결책으로 좁은 선로를 달리는 큰 차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선택을 했다.
기차선로의 예는 기술 개발에 활용되는 상상력과 창의성의 통합적 측면을 보여준다. 공학자들은 무엇이든 ‘최적화(optimization)’하기를 좋아한다. 대개 주어진 변수가 최대 혹은 최소가 되는 값을 찾는 최적화는 공학 교육의 핵심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수학적으로 최적화는 항상 ‘주어진 조건’하에서의 최적화를 의미한다. 조건이 바뀌면 최적화의 결과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공학적 설계의 해답은 여러 개일 수 있다.
하지만 기술자들이 유일하게 최적화된 해결책을 볼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통상적으로 적용하는 조건의 집합, 즉 기술적 틀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한 수학의 특성상 양화(量化)될 수 있는 변수에 대해서만 이루어지는 최적화가 문제의 양화하기 어려운 측면을 놓치고 있을 수도 있다. 원자력 발전의 효율성에 대해 수학적으로 흠 잡을 데 없는 계산이 장기적인 폐기물 보관 및 위험 비용을 고려하면 달라질 수 있는 상황이 이에 해당된다.
기술적 최적화가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조건의 조합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 사회적으로 다양한 집단의 이해관계 조정과 기술적 미래에 대한 사회문화적 가치가 반영되어 결정된다. 그렇기에 기술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에게 진정한 혜택을 주기 위해서는 주어진 문제를 최적화 모형에 따라 답을 구하고 그것을 실현시키면 되는 것이 아니다. 보다 통찰력 있는 공학자라면 통상적인 최적화 과정에서는 배경 조건이나 상수로 취급되는 요인들이 다른 값을 지닌다면 어떤 일이 가능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런 최적화가 이루어지는 환경 자체를 바꾸는 것이 사회문화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고민해 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공학자는 주어진 문제를 올바르게 최적화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관련 사안을 폭넓게 고려하여 문제 자체를 새롭게 설정하고 이를 다시 최적화해내는 확장된 상상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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