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환규 | 부산대 정보컴퓨터공학부 교수
우주에서 날아오는 신호가 외계인이 보낸 것인지, 아니면 그냥 잡음인지는 압축 프로그램으로 알아낼 수 있다. 이 작업은 외계어의 문법을 몰라도 상관없다.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은 측정된 신호를 몇 개의 디지털 부호로 변환한 신호 파일이다. 그 다음 신호 파일을 흔히 사용하는 압축 프로그램으로 묶어 그 크기를 살펴보면 된다. 만일 신호 파일의 크기가 압축으로 크게 줄어들었다면 그 안에는 어떤 의미가 포함돼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의미가 있으면 규칙이 있고, 규칙이 있으면 압축 프로그램이 그것을 찾아 반복되는 부분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개들이 짖는 소리를 고·저·장·단에 따라 4개의 부호로 기록할 수 있는데 이것을 압축해보면 그 안에 어떤 의도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개들이 짖는 소리는 압축이 꽤 잘 되는 편이다. 압축 프로그램은 ‘개들의 소리’를 ‘개소리’라고 멸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만일 어떤 신호가 완전한 잡음, 그러니까 아무런 의미도 없이 제멋대로 형성된 것이라면 그 안에는 어떤 규칙도 반복도 없기 때문에 결코 압축될 수 없다. 따라서 무의미한 신호를 달리 정의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압축을 해도 그 크기를 줄이지 못하는 신호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람들끼리 나누는 이야기도 이와 비슷한데, 의미가 있는 이야기일수록 쉽게 압축이 된다. 흥부놀부전은 “착한 흥부가 복을 받고 나쁜 놀부는 벌을 받았다”는 식으로 압축이 가능하다. 하지만 직장상사 불평을 하다가, 갑자기 군대 이야기하고, 또다시 뜬금없이 주식 이야기하는 식의 횡설수설 술주정은 아무리 요약을 하려 해도 그게 잘 안 된다. 무의미한 이야기들의 특징은 술주정과 같이 압축 요약이 어렵다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바둑의 고수라 할지라도 필자와 같은 19급의 바둑을 복기하기란 불가능한데, 고수가 보기에 필자의 수순은 횡설수설 술주정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바둑고수들이 10년이 지난 대국을 그대로 재연할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필연의 수순이 숨어있기 때문에 압축되어 기억되는 것이다.
압축을 이용하면 그 의미를 전혀 모르는 기록물이 서로 얼마나 유사한지도 쉽게 측정할 수 있다. 두 개의 기록물 A와 B가 비슷하면 할수록, A 뒤에 B를 붙여서 만든 통합문서 AB의 압축률은 높아진다. 왜냐하면 B의 많은 부분이 이미 A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그 부분은 몇 개의 표식으로 줄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실험을 해보면 바흐 뒤에 헨델의 곡을 접붙인 음악은, 바흐 뒤에 메탈리카나 마일즈 데이비스의 재즈를 붙인 것보다 훨씬 더 높은 비율로 압축됨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메탈리카보다 헨델이 바흐의 악풍과 더 유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압축기법을 활용하면 전문가의 도움 없이도 음악을 장르별로 자동 분류할 수 있다. 또한 바흐로부터 스트라빈스키까지의 서양음악 계보도 그럴듯하게 유추할 수 있다. 나아가서 미확인 악보의 작곡가, 미확인 소설의 작가까지도 압축기법으로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의 모든 문화적 행위에는 제 각각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를 기록한 문서는 압축될 수밖에 없다. 음악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민족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압축기법을 이용해서 분류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언어의 유사성은 각각의 소설을 서로 붙여서 압축한 뒤, 그것이 원본에 비해서 얼마나 줄어들었는지를 측정해봄으로써 계산될 수 있다.
실제 이탈리아 물리학자들은 아무런 언어학적, 역사적 지식을 활용하지 않고, 오로지 압축도구만으로 50여 종의 유럽 언어를 분류할 수 있음을 보였다. 그 결과에 따르면 터키어와 가장 가까운 언어는 우즈벡어이며, 카탈루냐 말은 프로방스 사투리와 가장 가깝다고 한다. 이런 압축이론은 러시아 수학자인 콜모고로프에 의해서 제시됐으며, 정보화시대를 맞이하여 다시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경향DB)
삶 전체를 몇 개의 문장으로 압축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예를 들어 안중근 의사의 삶은 ‘멸사봉공’, 이 네 글자로 압축된다. 그는 논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멸사(滅私)를 완성했다. 이보다 더 간결하게 압축되는 삶의 예를 찾아볼 수 있을까. 한편 최근 청문회에서 볼 수 있었듯이, 어떤 분들은 압축이 아주 어려운 삶의 궤적을 보여주기도 했다. 멸사봉공 공직자의 임무 그 와중에도, 깨알같이 시간을 쪼개 일신의 영달을 위해 분투노력한 분의 삶, 즉 수많은 예외로 가득한 삶은 압축이 불가능하다.
압축이 가능한 일관성은 가장 기본적인 사람의 덕목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생의 일관성을 위해서, 또한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 담배를 끝까지 피운다고 우기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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