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원 | 서울시립대 교수·철학
기술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인간의 삶이 시작된 이래로 생활의 변화를 가져온 온갖 도구들의 발명을 모두 기술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기술의 어원적 의미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기술 곧 테크놀로지(technology)라는 용어는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된 테크네(techne)라는 말에서 유래했는데, 테크네는 인간 삶의 가치나 목적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생산해 내는 것을 가리켰다. 이처럼 기술을 인간의 도구로 보는 관점은 인간이 역사적으로 처음 가졌던 기술에 대한 시각인 셈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지식이나 활동을 에피스테메(episteme)와 테크네로 구분했다. 에피스테메가 사물의 본질과 원리를 밝혀내는 높은 수준의 정신적인 활동을 가리킨 반면, 테크네는 원래 목수가 무언가를 만들고 생산하듯 기예, 기교, 재주가 동반된 실제적이고 전문적인 활동을 가리켰다. 그러나 각각의 중요성은 달랐다. 에피스테메가 인간 삶의 가치와 목적을 제공해 주는 숭고한 것이라면, 테크네는 목적 달성에 필요한 도구를 제공해 주는 물질적이고 실용적인 것으로 인식됐다. 그런 연유로 테크네는 인간의 삶의 목표나 가치 생산에 기여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덕이나 최고선의 추구에 해로운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도구로서의 기술에 대한 이해는 근대에 이르러 과학혁명과 계몽사조를 거치면서 한층 확대되고 강화됐다. 가령 16세기 영국의 철학자인 프랜시스 베이컨은 인쇄술이나 화약 발명 같은 기술이 자연을 제어하고 조작함으로써 인간 생활을 윤택하게 만드는 힘이며, 어떤 정신적인 활동보다도 인간에게 훨씬 이롭다고 보았다.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는 자연의 강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기술을 통한 자연의 정복을 선으로 규정했다. 프랑스의 <백과전서>로 대변되는 근대 계몽사상도 이와 유사하게 과학지식의 발전이 연이어 기술의 발전을 가져오고, 기술의 발전이 다시 부의 증대와 함께 인류 사회의 진보를 가져온다고 강조했다.
근대까지만 해도 기술이 인류 사회의 진보를 달성하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도구론적 신념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시각에서 기술에 대해 의미 있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도구로서의 유용성, 효율성에 관한 것일 뿐, 그 이상으로 기술이 인간의 삶에 던져주는 새로운 존재론적 문제나 가치에 대해 사유한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현대에 오면 기술이 문명의 이기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는 수준까지 발전하면서 기술에 대해 던지는 질문이나 기술을 바라보는 시선은 더 이상 도구론적 관점에 머물 수 없게 됐다. 그런 연유일까. 20세기에 이르러 기술의 진정한 본질은 무엇인지, 기술은 인간에게 어떤 존재적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 등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 고민이 시작됐다.
현대 과학기술 이미지 ㅣ 출처:경향DB
20세기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오늘날 우리가 한번쯤 음미해 볼 가치가 있는 기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던져주고 있다. 그는 기술은 비록 도구이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 인간이 세계의 사물들과 교섭하는 창구로서 사물들의 존재 의미를 구성하는 능력을 지닌 비중립적 존재임을 강조한다. 거대한 우주를 관측할 때 우리는 전파망원경 같은 도구를 통해 세계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는데, 이때 도구가 세계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우리가 갖는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가령 맨눈으로 황금빛을 내는 쟁반 같은 보름달을 관찰하는 경우와 천체망원경으로 달의 운동을 관측하는 경우 그리고 특수 기능의 전파망원경으로 달을 구성하는 물질들의 성분을 관측하는 경우, 각각의 도구를 통해 드러나는 달의 존재 의미는 달라진다. 첫 번째 달이 시적인 존재로서의 의미를 갖는다면, 두 번째 달은 지구 주위를 도는 위성으로서의 존재 의미를 갖게 된다. 하지만 세 번째 달은 특정한 광물질의 보고로서의 존재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이렇게 기술은 세계의 존재론적 의미를 새롭게 구성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현대 기술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닌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이를 상실한 채 그것이 생산해 낼 수 있는 이윤가치를 중심으로 평가하도록 강요한다고 하이데거는 주장한다. 가령 특수 망원경을 통해 광물질의 보고로 존재 의미가 새롭게 부여된 달은 더 이상 시적인 달이나 지구의 위성으로 남아 있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특정 광물질을 생산하는 하나의 광산으로 각인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현대 기술은 더 이상 인간과 세계에 중립적으로 작용하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며,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왜곡시키거나 변형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이데거는 기술이 더 이상 인간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보도록 압박하는 존재일 수 있음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컴퓨터가 만들어 가고 있는 신세계를 보고 있자면 우리가 기술을 필요한 만큼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기보다는 우리가 기술에 의해 규정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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