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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오디세이

핵을 둘러싼 ‘비현실적 몽상’

올해는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광복은 일본이 1945년 8월15일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찾아왔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핵폭탄이었다. 1945년이 되면서 일본 전역에 퍼부어진 소이탄으로 전국이 불바다가 되면서 일본의 패망은 거의 확실해졌다. 그런 와중에도 일본 군부는 천왕제를 지키기 위해 막판까지 미국과 항복 조건을 협상하려 들었지만, 핵폭탄은 일본의 마지막 자존심도 굴복시켰다.

핵폭탄은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이끄는 대규모 과학자 및 공학자 팀이 로스 알라모스에서 수행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의해 만들어졌다. 핵폭탄 개발 과정에서 과학자들과 공학자들은 수많은 이론적 난제와 정교한 기폭장치 개발과 같은 실천적 문제를 풀어야 했다. 그런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첨단 과학기술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맨해튼 프로젝트는 기본적으로 군사작전이었고 이 프로젝트의 최고 책임자는 과학자 오펜하이머가 아니라 군인인 그로브스 준장이었다. 자유로운 정보 교환에 익숙한 과학자들이 규율과 복종을 강조하는 군인들과 프로젝트 기간 내내 충돌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는 이런 충돌의 영국판이 등장한다.

로스 알라모스에 모인 과학자 대부분은 파시즘이 유럽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을 막기 위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오펜하이머를 포함해 그들 중 상당수는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을 때 프랑코 파시즘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독일보다 먼저 핵폭탄을 개발하지 않으면 유럽 전체가 전체주의 국가가 될 수 있다는 절박감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기에 독일이 패망하자 절대 다수의 과학자들은 그들의 목적이 이미 달성되었다고 생각해 이미 개발된 핵폭탄 사용에는 반대했다. 하지만 이미 남태평양 전투에서 많은 희생을 치른 미국 정부로서는 핵폭탄을 사용하지 않은 채 일본 본토에 상륙해 더 많은 군인을 희생시키는 결정을 내리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그때까지는 동맹 관계를 유지했던 구소련의 확장을 막기 위해, 미국의 위상을 과시할 전략적 이유도 있었다. 이런 상황 논리에 맞서 많은 과학자들은 일본 정부 대표를 초청해 핵무기의 ‘위력’만을 보여주자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핵무기는 더 이상 나치즘을 유럽에서 몰아내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보장해주는 전략 무기가 되었다.

결국 핵폭탄이 사용되었고 일본은 바로 백기를 들었다. 여기에 고무된 미국 트루먼 정부는 미국이 핵무기를 내세워 전후 국제 관계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물리학의 원리는 보편적이기에 경쟁국도 금방 핵무기를 개발할 것이라는 점을 과학자들이 아무리 지적해도, 트루먼 정부는 구소련이 핵폭탄을 개발하려면 적어도 수십년은 걸릴 것이라고 오판했다.

과학자들은 전후 세계에서 핵물리학과 핵공학의 지식은 인류 복지를 위해 널리 공유되어야 하며 민간 국제기구에 의해 공동 관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당분간 자신들만이 핵을 독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트루먼 행정부는 이 제안을 ‘비현실적인 몽상’으로 무시했다. 오펜하이머를 포함한 수많은 과학자들이 세계 각국이 핵무기를 비축하는 군비 경쟁에 들어갈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이 역시 무시되었다. 그 후 전개된 냉전의 역사는 결국 과학자들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음을 증명한다.

세계 핵무기 현황 (출처 : 경향DB)


당장에 그럴듯해 보이는 현실적 이익에 대한 고려가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한 경우는 핵무기 개발 사례만이 아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핵발전소 수명연장을 두고 논란이 진행 중이다. 수명이 다한 핵발전소를 다시 사용하려는 결정에는 분명히 전력 사용량 예측에 따른 현실적 이익에 대한 고려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핵발전은 궁극적으로는 포기되어야 할 재앙의 기술임이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핵공학자들조차 안전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는 핵발전소 연장을 ‘현실 논리’를 앞세워 밀어붙이는 정부의 태도는 과거 트루먼 정부의 어리석음을 답습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현시점에서는 ‘비현실적 몽상’으로 여겨져도 장기적 관점에서 바람직한 선택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핵폭탄과 냉전의 역사가 잘 보여준다.


이상욱 | 한양대 교수·과학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