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단어에 여러 가지 뜻이 들어있는 동음이의어는 맥락을 알기 전에는 그 뜻을 구별하기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배’라는 일상적인 단어도 사용되는 문장에 따라 전혀 다른 뜻을 가진다. ‘먹어 본 배 중에서 가장 달다’, ‘배가 너무 고파 쓰러질 것 같다’, ‘강물에 이 배를 띄우자’에서와 같이 문맥을 살펴보아야만 사용되는 단어의 정확한 뜻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 따르면, 이들 동음이의어 사이에도 적자생존의 싸움이 일어난다고 한다. ‘창밖에 내리는 눈(雪)을 바라보는 그의 눈(眼)에 눈물이 흐르고 있다’에서의 ‘눈’이라는 단어와 ‘겨울밤(夜) 옹기종기 모여앉아 화로에 구워먹는 밤(栗) 맛을 어디에 비할 수 있을까’에서의 ‘밤’이라는 단어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각각 소리의 길고 짧음이 다르니 원래부터 동음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영어 단어의 발음에는 길고 짧음을 구별하는 데 신경을 쓰면서도 우리말을 발음할 때에 그 길고 짧음은 소홀히 하여 잘 구별하지 못하게 된 현대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이 단어들이 당당하게 동음이의어로 분류되는 시대가 되었다. 언어가 시대적 산물임을 말해주는 사례이다.
음의 장단 구별을 소홀히 하다 어느덧 동음이의어로 변모되는 현상이 수학 용어에서도 나타난다. 수직선이 그 예이다. 수ː직썬이라고 길게 발음해야 하는 수직선(數直線)은 그 위에 있는 각각의 점에 오직 하나의 숫자를 대응시킨 직선을 말한다. 반면에 수직썬이라고 짧게 발음하는 수직선(垂直線)은 주어진 직선과 직각으로 만나는 즉 수직이 되는 직선을 말한다. 하지만 한글로는 수직선이라고 동일하게 표기하며 소리의 길고 짧음을 구별하지 않다 보니 이 두 단어가 동음이의어로 둔갑한 것이다. 문맥에 따라 수ː직썬 또는 수직썬으로 각각 길고 짧음을 구별하여 읽어야 옳으니 동음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 구별이 쉽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는 동음이의어가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수학적 용어의 또 다른 예로 소수를 들 수 있다. 0.1 또는 0.25와 같이 0과 1 사이에 있는 작은 수를 말하는 소수(小數)는 소ː수라고 길게 발음해야 한다. 한편 2, 3, 5, 7…과 같이 자연수 중에서 약수가 1과 자기 자신의 두 개밖에 없는 수를 뜻하는 소수(素數)는 소쑤라고 짧게 발음해야만 한다. 여기서도 소수라는 하나의 표기를 놓고 문맥에 따라 소ː수 또는 소쑤로 구별하여 읽어야 마땅하지만 요즘에 이를 구별하여 읽는 사람을 발견하기가 그리 쉽지 않으니 이 용어 또한 동음이의어가 된 것이다.
사실 이런 용어상의 혼란은 지난 세기 우리의 근대화 과정에서 학문이 도입되었던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대단히 안타깝지만 우리 스스로 서구 학문을 도입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이 이루어낸 결과를 그대로 빌려왔던 역사적 사실이 이러한 혼란의 빌미를 제공하였으니 말이다.
수직선은 영어의 number line과 perpendicular를 일본인들이 각각 數直線(すうちょくせん)과 垂直線(すいちょくせん)으로 번역한 용어이다. 소수의 경우도 영어의 decimal과 prime number를 그들이 각각 小數(しょうすう)와 素數(そすう)로 번역했는데, 우리는 이 번역어를 한자만 빌려와 소리 나는 그대로 읽었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영어 발음에는 신중을 기하면서 우리말 발음은 소홀히 여기는 젊은 세대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국어 교육이 잘못되었으니 바로잡아야 한다는 훈계를 늘어놓으려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한글과 한자어를 함께 쓸 것을 주장하며 새로운 논쟁을 촉발하려는 것은 더욱더 아니다. 단지 수학을 배우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의 원인이 수학과목 그 자체에도 존재하지 않을까 탐색해보자는 것이다. 즉 학습자 개인의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제공되는 수학 지식의 내용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가정하에 수학적 용어를 생각해본 것이다.
한국어로 하나되는 세종학당 (출처 : 경향DB)
언어는 추상적 아이디어에 관한 사고를 형성하는 강력한 도구이며, 따라서 하나의 언어에 의해 형성된 사고는 고착화될 수밖에 없다. 소수라는 용어를 처음 배우며 0.1과 같은 수를 연상하다가 같은 용어를 사용하며 2, 3, 5, 7…과 같은 특별한 자연수를 다시 떠올려야 하는 학습자의 어려움을 가르치는 사람이 이해하자는 것이다.
박영훈 | 수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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